성공한 남자의 연대기는 대개 박수 소리 가득한 성취의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노아 바움백의 <제이 켈리 Jay Kelly, 2025>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 The Mule, 2018>은 그 박수 소리 뒤에 자리한 삶의 회한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은 놀라울 만큼 닮은 궤적을 그린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 제이 켈리는 연기에, 얼 스톤은 원예에 온 삶을 몰입해온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쌓아온 커리어의 탑은 그저 홀로 우뚝 서 있으며, 그 주변 어딘가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물론 이들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가족을 외면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일에만 심취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가족들과의 관계가 허물어져가는 것을 방관했을 따름이었다. 커리어와 성공이라는 명분으로 관계의 시간을 유예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두 작품의 공통적인 미덕은 이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선택했다는 식으로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의 용서나 감동적 화해를 엔딩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이 평생에 걸쳐 선택해온 삶의 진실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스크린 밖에서 가족에게조차 연기하는 아버지
조지 클루니가 연기하는 제이 켈리는 평생 화려한 배역만을 맡아온 인물이다.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지만, 그것은 타인을 향한 진심어린 배려라기보다는 사랑받는 스타로서의 관성이다. 그는 딸들과의 대화조차 마치 잘 짜인 시나리오의 한 장면처럼 소화하려 든다. 제이는 딸과의 관계를 회복해보려 여러 가지 자기변명을 섞어가며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아빠는 늘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면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식의 냉담한 반응만 돌아온다. 딸의 시선 속에서 제이는 ‘딸과 대화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딸과 대화하려는 멋진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처럼 보이는 것이다.
노아 바움백은 이런 순간 제이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클로즈업하지만, 그의 허영심을 비웃기보다 허무함을 관조한다. 영화제 공로상을 받는 장면에서도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제이의 미소는 부재한 가족에 대한 기억 속에서 갈 곳을 잃는다. 영화계에서는 모든 것을 이루며 정점에 이르렀지만, 딸들에게는 그저 스크린 속에서만 다정한 아버지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는 평생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온 스스로의 삶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였다. <제이 켈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스크린 속의 삶과 자연스럽게 주어진 현실 속의 삶 간에 자리한 이 같은 단절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얼 스톤은 백합 키우기에 매료되어 온 삶을 바치며 높은 명성을 쌓았지만, 정작 집에서는 딸의 결혼식 날짜조차 챙기지 못하는 낙제 수준의 가장이었다. 집 밖에서는 유머러스하고 관대하며 꽃을 돌보는 데는 지독할 정도로 성실한 그가 정작 가족과의 삶에 대해서는 처참하게 무능하며 평생토록 상처만 남긴 것이다. 관계를 연기하는 제이와 달리 얼은 아예 관계 자체를 외면한다.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와 낡은 트럭이 만들어내는 황량한 공간은 가족의 삶과 유리된 얼 스톤의 삶이 빚어내는 심리적 거리를 시각화한다. 그의 아내 메리는 백합 축제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찬사를 받는 그런 얼의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르러 마약 운반책으로 큰돈을 번 얼이 뒤늦게 나타나 그의 삶이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하지만, 이미 헤어진 아내 메리는 차가운 태도를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밖에서 대단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걸 즐겼겠지만, 집에서는 그저 딸의 결혼식조차 잊어버린 남자였을 뿐이라고 상기시킨다. 결국 그는 아내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약 운반이라는 '일'을 멈추고 아내의 ‘곁’을 지킨다. 돈이면 뭐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을 살 수는 없었다는 얼의 대사는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얼이 깨달은 가장 가혹한 진실이었다. 그렇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얼이 아내와 함께했던 마지막 시간을 굳이 대단한 화해의 실마리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저 어두운 방 안, 이미 돌아갈 곳 없는 노인이 되어버린 그와 메리의 실루엣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다. 직업의 성취와 관계의 파산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했던 그의 삶이 만들어낸 적막함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판단하지 않는 카메라와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관조적 시선
주인공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노아 바움백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은 빛을 발한다. 두 감독은 주인공의 뒤늦은 후회를 미화하여 신파적 감동을 자아내려는 유혹을 거부한다. 스스로를 ‘어쩔 수 없었던 예술가’나 ‘가족을 위해 헌신한 가장’으로 포장하며 살아온 두 주인공의 객관적 위치는 그들 곁에서 소외되어온 가족들의 눈빛 속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이들이 냉정한 시선으로 내뱉는 짧은 언급은 주인공의 자기중심적인 변명을 무력화시키는 진실의 칼날이 되어, 이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과오의 결과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두 감독은 주인공을 냉정하게 단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했으면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식의 비겁한 합리화를 돕지도 않는다. 바움백은 제이의 허망한 손동작을 길게 포착하고, 이스트우드는 죄수복을 입은 얼이 교도소 화단에서 꽃을 가꾸는 뒷모습을 비춘다. 제이의 사과는 여전히 서툴고, 얼의 속죄는 결국 감옥이라는 사회적 대가로 이어지지만, 카메라는 그저 그들의 회한어린 눈빛과 굽은 등을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인생은 원래 이렇게 어긋나는 것이라는 비가역적 삶의 숙명적 결과에 대한 관조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온 삶의 결과를 그려가며, 그저 이런 삶이 있다고 담담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관객에게 묘한 안도감을 준다. 주인공을 옹호하거나 비난해야 한다는 편향된 의무감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삶이 가진 결핍과 그로 인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감독들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초라한 뒷모습에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한 겹 입힌다. 이는 그 인물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근원적인 어리석음에 대한 안쓰러움에 가깝다.
<제이 켈리>와 <라스트 미션>은 우리에게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삶 너머에 있는 어두운 방을 보여준다. 그 안에 남겨진 것은 상처받은 타인들과 더불어 어쩌면 애써 외면했던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다. 두 영화가 주는 울림은 값싼 위로보다는 오히려 내가 놓친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며, 그 후회와 공백의 시간을 견디는 것 또한 나의 몫이라는 냉정한 진실의 드러냄이다.
두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두 영화의 서사는 우리 사회의 은퇴기 남성들이 마주한 현실과 지독하게 닮았다. 산업화 시대의 막내로서 성장의 열매를 수확해온 이들 세대에게 일과 성취는 곧 존재 증명에 다름 아니었다. 회사라는 전쟁터에서 일로서 살아남고 무언가 의미 있어 보이는 사회적 성취를 거두는 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이기적인 선호로 선택한 수많은 시간들마저도 다 그 성취를 위해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강변해온 것이 이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스트 미션>의 얼처럼 아마도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명성'보다는 '공유된 기억'일 것이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제이 켈리>의 제이처럼 세련된 화법조차 갖추지 못한 한국 사회의 상당수 남성들은 때때로 권위주의라는 낡은 무기를 휘두르다 더욱 깊은 고립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한다. 일에 매몰되어 정서적 근육이 퇴화해버린 남성들에게,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닌 실재하는 진실이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거울이 된 스크린과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반성적 회고
그리하여 이 두 영화는 하나의 거울이 되어 우리에게 담담히 이야기한다. 제이와 얼이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비로소 일이라는 외투를 벗고 맨몸의 자신을 마주한 것처럼, 이제 더 이상 뒤에 숨을 명함조차 사라져 초라해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타인의 시선으로 관조해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자신의 삶에서 주변화된 가족들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의 자신과의 완벽한 화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저 잃어버린 시간을 인정하며 내딛는 무거운 발걸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이기적인 남자들을 차마 미워하지 못하고, 그들의 뒷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며 반성적 회고를 시작하게 되는 이유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퇴장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두 영화는 박수 소리가 멈춘 뒤에야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정직한 진실을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