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웅이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던 당시의 조선에는 정규 학교 교육과정을 통한 미술가를 양성하는 전문 미술학교가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을 시작으로 나라의 운명과 함께 도화서가 폐지되면서 조선 회화의 명맥을 유지하던 숨골마저 흩어졌다. 특히 ‘닭똥칠’하는 서양화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교습소가 전부였다. 그런 유수기에 고희동을 비롯한 1세대 일본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미술’이 예술화되는 길에 단체가 조직되고 부설 학습소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미술원>, <서화협회>, 등 구본웅을 비롯한 김용준, 길진섭, 김주경, 이마동 등이 공부했던 단체들이다. 그리고 그들만을 위한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 등 전시회가 독립된 공간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 땅에서는 거기까지고, 잔치는 일본인을 위한 것이지 조선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공부를 하려면 배를 타야 했다.
도쿄의 서양화단-새로운 흐름
1930년을 전후해서 당시 일본화단에서는 일본화나 서양화 모두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본만의 고유한 회화를 추구하는 시도이다. 일본 서양화단은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1866-1924)가 동경미술학교에 서양화과를 개설하면서부터 화단의 맹주로 군림했던 아카데미즘 즉, 인상파 바탕의 절충화풍인 외광파가 점차 퇴조하고 있었다.
같이 고전적인 아카데미 화풍을 추구했지만 구로다 세이키의 백마회(白馬會)와 반대편에 섰던 태평양화회(太平洋畵會)의 카노코기 다케시로(鹿子木孟郞)가 파리에서 돌아와 '우리들 양화가는 일본의 자연을 배반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비난해야 하며 일본인은 일본의 특색을 살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본적 서양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구본웅이 유학했던 곳이 바로 이 태평양화회 산하 태평양양화연구소(1930년 미술학교로 승격)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로 간 유학생들은 전 세대 유학생들과는 달리 아카데미의 특정 대가에게서 사숙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양한 사조의 그림을 배우면서 자신들의 아틀리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제작하고 직접 마티스나 블라맹크를 방문하여 작품 비평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고루한 외광파 중심의 서양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일본적 서양화’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입체파, 야수파 등 강한 개성과 격정적 표현의 새로운 미술 사조가 함께 들어와 자리 잡으며 젊은 미술가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대표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사토미 가츠조(里見勝蔵, 1895-1981)와 요절한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1898-1928), 마에다 칸지(前田寬治, 1896-1930) 등이다.
이들 중 1921년 파리로 유학한 사토미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등과 함께 야수파 운동에 참여했던 모리스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에게 배운 후 1925년에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전통적인 서양화풍의 관전(官展)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제국미전)의 일과(一科)에 출품하지 않고, 관전의 운영 방식과 진부함에 반기를 들고 창설한 진취적 경향의 민전(民展)인 이과(二科)라 부르는 《이과회미술전람회》(이과전, 이과회전)에 출품하여 입상하였고, 1927년에는 유학 시절 친분이 있는 30대 초반의 화가 다섯 명과 ‘1930년 협회’를 결성하여 공모전을 여는 등 일본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열정적인 활동을 한다.
[좌] 1958년 사토미 가츠조(좌)와 블라맹크(우) / 사진. ⓒ 일본 도쿄 일동화랑 [우] 블라맹크, <자화상>, 1900년, 캔버스에 유채, 73x50cm / 그림. ⓒ퐁피두센터
사토미는 더 나아가 권력화된 ‘이과회’를 벗어나 1930년 가을에 ‘1930년 협회’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하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창립을 주도한다. 그리고 1931년 1월에는 ‘제1회 《독립미술가협회전람회》(독립미전 또는 독립전)’를 개최하면서 일본적인 야수파가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즉, 1930년대 일본 서양화단은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이 상대적으로 시들해지고, 신일본주의 기류와 일본의 2세대 프랑스 유학파들이 마티스나 블라맹크 등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과 직접 접촉하며 체득한 경향이 만나면서 일본 화단에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도쿄 우에노 학교 시절
이러한 도쿄 화단의 새로운 환경 속에 1928년 구본웅은 동경에 있는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畫學校)에 들어갔다. 가와바타학교는 대부분 학생이 도쿄미술학교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교습소 성격의 예비학교로 석고 데생이 주된 수업이었다. 조선에서 그림과 조각 작품으로 수상 경력이 있음에도 구본웅은 일본의 미술학교 분위기를 익히려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가와바타 시절을 뒤로하고 1929년 봄, 니혼(日本)대학 미학과에 입학해 예술 이론을 공부한다. 비록 1년이지만 이때 학습경험이 귀국 후 평론가로서의 비평 활동과 자신만의 미술론을 펼치는 자양분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위] 가와바타화학교, 태평양전쟁 때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 사진. ⓒ일본 유린북 [아래] 현 니혼대학 법학부, 미학과가 있던 곳으로 김환기도 여기서 공부했다. / 사진. ⓒ심원보
1년간의 일본대학 미학과 생활을 마친 1930년, 그는 아카데믹한 고전파와 인상파의 아류를 뒤쫓고 있던 관립학교인 도쿄미술학교가 아닌 일본식 서양화를 주장하던 다이헤이요미술회(太平洋美術)연구소에 들어간다. 이미 일본대학 시절인 1929년에 이 연구소가 주최한 태평양 콩쿠르 입상은 도쿄미술학교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1930년 10월 양화전문의 미술학교로 승격)를 선택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입학하던 1930년에도 연속해서 태평양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이 학교에서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위] 1929년 태평양미술학교 스케치, 이 건물도 폭격으로 사라졌다. / 사진. ⓒ야후 재팬 [아래] 현 태평양미술회 / 사진. ⓒ 심원보
이때 그는 운명적으로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새로운 미술사조를 대표하는 사토미 가츠조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구본웅은 1930년 가을에 사토미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출품했던 《이과전》에 출품하여 입선하게 되면서 사토미의 화풍에 심취하게 된다. 구본웅과 절친했던 이마동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출품된 작품이 <비파와 포도>라고 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영향과 대각선 구도와 과감한 생략에 의한 묘사는 야수파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단순한 배경처리와 화면 가득한 탁자의 단순화된 평면적 처리의 입체주의 공간 구성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 이과전 입선 기사 / 사진. ⓒ매일신보 (1930.9.5.) [아래] 구본웅, <비파와 포도>, 1930년, 캔버스에 유채, 50x65cm / 그림. ⓒ국립현대미술관
《이과전》에는 1929년 파리에서 미국을 거쳐 귀국 길에 동경에 들른 나혜석이 <정원>을 출품하여 수상한 적이 있다. 다음 해 구본웅의 수상은 신문에 보도되어 화제가 됐다. 그의 수상 이후 조선인 입상자는 김종태, 김환기, 이쾌대, 최재덕, 김두환 등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에도 곽인식, 권진규 등이 출품하여 입상했다. 《이과전》은 조선미술전람회를 비롯한 국가주도전람회에 대한 재야전의 가능성을 일깨운 의미 있는 전람회다. 또한 야수파와 표현주의에 심취해 있던 구본웅은 사토미가 주도한 보다 전위적인 ‘독립미술가협회’의 《독립전》에 출품해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선했으며, 1936년에 유영국, 1937년에 김만형이 그 뒤를 따랐다.
구본웅은 거주하던 우에노 근처의 니시닛포리에서 제법 떨어진 도쿄 이오기의 사토미의 아틀리에로 찾아가 그림을 공부했다. 야수파를 상징하는 구본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여인>과 사토미의 <여>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손을 머리 뒤로 올리고 여인의 자세와 시선, 몸의 윤곽과 거친 색감이 매우 유사하여 스승 사토미 가츠조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1909년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이래 1930년대 초까지는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도쿄미술학교 입학생이 매년 두세 명에 불과하고 학제 개편으로 입학 자체가 어려워질 때, 태평양미술학교, 제국미술학교, 문화학원 등 비교적 입학이 쉽고 자유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는 사립 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신설 사립학교는 신일본주의 바람과 함께 입체파나 야수파 등 새로운 미술을 이끄는 교수들이 가르치면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와 새로움에 목마른 미술학도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탈권위적인 분위기와 입학 자격이 까다롭지 않고 조선인에 대해 비교적 차별 없는 분위기가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해방될 때까지 일본 미술학교의 조선 학생들은 500여 명에 서양화 전공자가 242명으로 추정한다. 서양화가 월등히 많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정규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별은 이쾌대, 장욱진 등 제국미술학교 104명, 고희동·김용준 등 도쿄미술학교 59명, 구본웅·이인성 등 태평양미술학교 23명, 유영국·이중섭 등의 문화학원은 14명, 나혜석·천경자 등의 여자미술학교는 27명, 김환기의 일본대학 5명이다.
1930년 도쿄의 미술학교 위치(우에노와 황궁지역) ①가와바타(川端)화학교 ②니혼(日本)대학 ③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 ④우에노 도쿄(東京)미술학교 ⑤여자미술학교 ⑥분카(文化)학원, 데이코구(帝國)미술학교는 동경 시내에서 떨어진 무사시노에 있었다. / 사진. ⓒ국제일본문화연구소 1930년 <동경시가전도>를 바탕으로 재구성
조선 유학생들의 다양한 학교 선택은 각 학교의 학풍과 지향했던 미술계의 경험이 자산이 되어 학업을 마치고 그들이 귀국한 후에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즉 일본 근대서양미술 아카데미즘의 성지였던 도쿄미술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귀국 후 미술대학 교육에서 아카데미즘을 주도했다. 그리고 제국미술학교와 태평양미술학교 출신들은 아카데미즘과 전위 사이에서 후기 인상주의부터 야수파, 표현주의 등 두터운 재야층을 형성했다.
자유와 전위를 표방했던 사립학교 문화학원과 일본대학 출신들은 추상미술의 1세대로서 활동하며, 유영국, 김병기, 김환기 등이 아카데미즘 일색의 초기 대학에서 차세대 전위세력을 키우며 1960년대 이후 대세가 되는 추상미술의 마중물이 됐다.
한편, 이들은 앞 세대 유학생들과는 달리 1930년 전후의 일본 화단의 변화를 보면서 시대 흐름에 걸맞은 정체성을 찾고 실천하고자 적극적으로 미술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특히, 도쿄 유학생들의 주류였던 아카데미즘의 도쿄미술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는데 김용준, 길진섭, 구본웅, 이마동, 김응진이 1930년 12월에 결성한 백만양화회(百蠻洋畫會)이 대표적이다.
테평양미술학교에 다니던 구본웅을 제외한 김용준 등 네 명은 모두 도쿄미술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이 학교가 다름에도 단체를 조직한 것은 서울에 있을 때 고려미술회와 중앙학교 도화교실 등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구본웅은 유학 시절 집안의 도움으로 도쿄에 매우 큰 집을 구해 생활했는데, 다방을 경영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는 집은 멋지게 장식한 실내 공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기계와 오디오 등을 갖추고, 친구들과 같이 잠도 자고 밥도 지어 먹으며 술과 커피를 마시며 지냈다. 구본웅이 집을 비워도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유학생들의 아지트이자 교류의 장이 됐다. 이렇게 유학생들과 어울리며 젊은 그들이 지향하는 미술에 대한 정체성과 미술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나누었음은 자명하다. 특히 구본웅이 추구하는 미술 세계가 도쿄미술학교의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이 아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사조의 ‘신미술’이었던 것도 이념을 지향하는 그룹을 같이 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임을 주도한 김용준이 1930년 12월 23일 동아일보에 「백만양화회를 만들고」라는 기고한 선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순수예술에 몰두하기 위해 예술 아닌 일체의 것과 비정신적인 일체의 것에 무관심을 표명했다. ‘가장 위대한 예술은 의식적 이성의 비교적 산물이 아니요, 잠재 의식적 정서의 절대적 산물인 것’이라고 정의하고, 피카소, 샤갈, 루오, 블라맹크, 라파엘 산치오를 열거하고, 고흐와 쉬르리얼리즘, 포비즘, 칸딘스키의 정신주의 등을 거론하면서 ‘열정의 고흐, 다색의 피카소, 백만(白蠻)의 무리는 이들 선구자의 족적을 밟아 다시 기원전의 사막을 밟으려 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화단의 담론을 주도했던 카프(KAPF) 미술에 대항하면서 일본의 제전 및 조선미전을 쥐고 있는 외광파적 아카데미즘과 결별하고, 서양의 현대 미술 사조들인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을 자유롭게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이 선언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31년 4월 중에 전람회를 경성에서 개최한다고 공언했으나 전람회는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맹렬한 시도는 구본웅이 귀국한 후 1934년 이들이 주축이 되어 ‘목일회(牧日會)’가 조직되고, 그해 5월 화신백화점에서 제1회 《목일회전》이 개최되면서 그들의 ‘백만양화회’가 조선에서 현실화됐다.
약 6년간의 유학 생활 중 다양한 전람회에서의 수상과 서울에서 한 번의 개인전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둔 구본웅은 1933년 3월 초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그해 여름 귀국선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