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템스강변에 우뚝 솟은 테이트 모던의 거대한 굴뚝을 보며 사람들은 현대 미술의 최전선을 떠올리지만, 그 뼈대는 버려진 화력 발전소의 낡은 벽돌이다. 방치될 법한 과거를 허무는 대신 현재의 가치를 채워 넣는 식의 재탄생, 오래된 껍데기 속에서 오늘의 시간을 살아가는 영국의 모습이다. 톰 스토파드(Tom Stoppard)의 연극 ‘아르카디아(Arcadia)’는 바로 그런 공간에서 시작한다.
‘아르카디아’는 시간을 넘어 어떤 흔적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배경은 영국 더비셔에 있는 대저택의 방 하나다. 19세기 초 풍경과 현대가 같은 공간 위에 포개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시대의 소품과 단서가 한 테이블 위에 쌓여, 관객은 방 안의 시간 층을 눈으로 보게 된다. 한 시대의 질문은 다른 시대의 연구 대상이 되고, 사라진 줄 알았던 흔적은 다시 발견된다. 1809년 이야기를 1993년에 쓴 희곡으로 2026년에 바라보는 관객은 이미 세 겹의 시간을 한자리에서 겪는다.
톰 스토파드의 1993년 작품인 ‘아르카디아’는 트레버 넌(Trevor Nunn) 연출로 내셔널 시어터에서 초연됐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와 내셔널 시어터를 이끈 거장 연출가의 손에서 이 작품은 일찌감치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은 재치 넘치는 유머와 이론적인 과학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능력, 산업화 이전 시대의 영국 전원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주의로 찬사를 받으며 올리비에 상과 이브닝 스탠더드 상 최우수 연극상을 받았다.
‘아르카디아’는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한 주제들을 쉽게 풀어내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담긴 희곡이다. 역사, 진실, 성, 수학 등의 본질에 대한 재치 있는 성찰을 담고 있으며 질서와 혼돈, 대칭과 불균형 같은 개념이 작품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
‘아르카디아’는 1993년 초연 후 2009년 듀크 오브 요크 극장에서 재연됐고, 그 뒤로 한동안 런던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톰 스토파드가 지난해 11월 29일 세상을 떠난 뒤 2026년 올드 빅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자연스럽게 한 작가의 생애와 겹쳐 보였다. 거장의 유산을 기리는 추모이면서, 그가 평생 작품을 통해 던졌던 질문들을 다시 현재형으로 호흡하게 했다.
마지막 왈츠 장면. / 사진. ⓒ Manuel Harlan
작품의 제목인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실제 지역명이다. 고대 목가 문학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골 낙원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유럽 회화에 등장한 라틴어 문구 “Et in Arcadia ego”, 곧 “나 또한 아르카디아에 있다”라는 말에서 ‘나’는 죽음으로 해석된다. 아무리 평화로운 낙원이라 해도 죽음은 그 안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아르카디아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유한성을 품은 채 잠시 빛나는 장소다.
관객이 재치 있는 농담에 웃고 있을 때도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토마시나는 열일곱 생일을 맞기 전 화재로 죽는다. 관객은 현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기에 마지막 장면은 더욱 애틋하다. 곧 닥칠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왈츠를 배우며 생명력을 뿜어내는 소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빛난다. 뉴턴의 우주가 결국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토마시나는 춤을 추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말하듯 뜨거운 차는 식어 상온과 같아지고, 잼을 넣고 섞은 쌀 푸딩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연극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킨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현대 기술과 인공지능 시대에도 무대에서의 공연은 매 순간 사라진다. 그러나 그 덧없음 속에서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장면과 대사도 있다. 우리가 수천 년 전 쓰여진 고대 그리스 비극과 ‘아르카디아’ 같은 현대 희곡을 감상하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조건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떠난 뒤에도 그의 문장이 무대 위에서 다시 숨을 쉬는 것처럼, 연극은 사라짐을 전제로 하면서도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