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추천 뉴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빚어낸 '영웅'은 정중하고 우아했다
[리뷰]정명훈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취임연주회
베토벤 교향곡 '영웅'으로 첫 인사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협연
베토벤 교향곡 '영웅'으로 첫 인사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협연
정중하고 우아하게 시작한 반주는 곡이 끝날 때까지 인상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KBS교향악단뿐 아니라 국내 모든 악단에서 볼 수 있는 협주곡 반주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정성스러운 연주였다. 깊이와 양감이 있는 전주에 이어 서두르지 않고 합류한 바이올린은 점차 절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고음을 넉넉히 짚으며 프레이징에 자기만의 무게를 실었다. 정명훈은 고개를 흔들며 세밀한 부분까지 독려했다. 비브라토는 적절하고 견고했다. 경사를 내려가는 듯한 급박함보다는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안정감이 지배적이었다. 빠른 악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렬한 보잉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굽이를 함께 타며 호쾌하게 총주로 터졌다. KBS교향악단이 이렇게 당당하고 큰 존재감의 오케스트라였던가.
카바코스가 짧게 바이올린 조율을 한 뒤 2악장을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는 뚜렷하고 바이올린은 뒤로 물러선 파스텔톤이었다. 정명훈은 엄격하게 반주를 통제했다. 플루트의 청아함이 바이올린으로 옮겨가는 듯 느껴졌다. 텐션이 풀린 듯한 카바코스의 바이올린은 팽팽하게 감긴 오케스트라의 현악군과 대조적이었다.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주고받는 부분은 오페라 아리아처럼 극적이었다. 3악장은 중후하면서도 경쾌했다. 카바코스는 마치 파가니니처럼 속주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교를 들려줬고, 오케스트라와 어긋난 곳도 있었지만 쾌속으로 끝을 맺었다. 앙코르는 바흐 파르티타 3번 중 루르. 산책하듯 자연스럽고 빼어난 연주였다. 곡이 끝난 뒤 5초 이상 침묵을 지킨 관객들 사이로 제의적인 공감이 번져가고 있었다.
경건하고 엄숙하게 시작한 2악장 장송행진곡은 깊이가 있었다. 유유자적한 템포는 그냥 느린 게 아니었다. 농밀한 경험의 집적과도 같이 다가왔다. 거대한 짐승이 죽어가는 묘사 같다가 최후의 일격을 발휘하는 정명훈의 유동적인 템포는 도도한 흐름을 유지했다.
4악장에서 현 피치카토가 ‘에로이카 변주곡’으로도 유명한 주제를 연주했다. 플루트의 활약이 여전했고 호쾌함과 치열함, 경이로움이 섞인 장엄함이 피어올랐다. 모든 악기들이 발산하는 빛이 모여 숭고함을 이루는 장면은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오랜만에 접했다. 독일적인 견고함과는 거리가 있는 정중하고 우아한 베토벤이었다. 약음부터 신중하게 만들어가는 노련한 마에스트로. 그가 키를 잡은 KBS호의 순항을 예상할 수 있는 취임 일성이었다.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