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선을 드러낸 의상으로 걷는 말레나 / 사진출처. IMDb
몸선을 드러낸 의상으로 걷는 말레나 / 사진출처. IMDb
무리 지은 아이들이 확대경으로 개미를 들여다본다. 카메라는 개미의 시점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얼굴들을 비춘다. “개미는 자신의 운명을 알까?”, “멍청하니 알 턱이 없지.” 순간 개미는 신경다발을 지닌 생명체에서 하나의 사물로 격하된다. 곧 확대경으로 모은 빛이 개미의 몸에 집중되고, 카메라는 개미의 몸부림을 집요하게 비춘다. 아이들은 곧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확대경의 초점이 어느 순간 그들의 몸통을 겨눌 수도 있음을. <말레나>(2000)의 도입부는 이 영화가 다루려는 세계의 실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확대경으로 개미를 죽이는 아이들 / 사진출처. IMDb
확대경으로 개미를 죽이는 아이들 / 사진출처. IMDb
영화에는 반복적으로 부감 장면이 등장한다. 건물 위에 선 군인들이 광장에 선 사람들을 응시하고, 원형 극장에 선 고대 로마군의 환영이 레나토(주세페 술파로)를 내려다본다. 이 장면들은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지닌 초월적 권위와 그에 짓눌린 개인의 위축을 드러낸다. 영화는 한 사춘기 소년의 성장기이자 초월적 아름다움을 가진 말레나(모니카 벨루치)가 전쟁을 통해 받은 고통과 상처, 용서를 다룬 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표면 밑에 더 깊은 정치적 함의를 다룬다. <말레나>는 파시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해부하는 영화다. 전쟁의 폭력은 포화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말레나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 역시 총검이 아니라 대중의 무지와 야만이었다.
광장에서의 부감샷 / 사진출처. IMDb
광장에서의 부감샷 / 사진출처. IMDb
영화의 배경은 194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가상 마을 카스텔구토다. 무솔리니의 연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총통은 목소리만으로 대중을 지배한다. 그 순간 말레나(모니카 벨루치)가 마을 광장을 가로질러 걷는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풍만한 몸매,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걷는 모습은 작은 시골 마을에 이질감을 드리운다. 요란한 박수 소리가 무솔리니를 향한 것인지, 말레나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장면은 파시즘적 숭배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적 응시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소년들은 말레나를 이름이 아닌 ‘엉덩이’로 부른다.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대리 실현하는 존재는 레나토다. 영화는 레나토의 시선으로 서사를 이끌며, 그의 성적 판타지를 빌어 말레나를 향한 대중의 ‘메일 게이즈(male gaze)’를 구현한다. 레나토의 시선은 언제 어디서나 말레나를 좇는다. 그는 말레나의 집에 침입하고, 벽에 난 구멍으로 그녀를 염탐함으로써 관객을 관음증에 동참시킨다.
거리를 걷는 말레나를 쳐다보는 남자들 / 사진출처. IMDb
거리를 걷는 말레나를 쳐다보는 남자들 / 사진출처. IMDb
말레나를 훔쳐보는 레나토 / 사진출처. IMDb
말레나를 훔쳐보는 레나토 / 사진출처. IMDb
영화 내내 말레나는 온전한 인격체가 아닌, 조각난 신체로만 등장한다. 레나토의 망원경 속에 들어온 것은 말레나의 젖가슴, 입술, 허벅지다. 그녀는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분절된 이미지의 집합으로 소비된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발언했듯, 사람들은 ‘추악한 욕망의 만화경’을 들고 말레나를 바라본다. 말레나가 매춘부로 나섰을 때, 레나토의 머릿속에서 만화경이 펼쳐진다. 만화경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말레나의 신체 일부를 확대 재생산한다. 말레나의 음란한 표정이, 그녀와 관계 맺은 남성들이 수많은 상으로 증폭된다. 말레나는 소문과 상상, 음담패설이 덧붙여진 집단 환상이 된다.

사람들이 말레나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녀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권력의 원천이 아니던가. 문제는 말레나가 대중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분석했듯 파시즘에 빠진 대중은 ‘스스로 사고할 능력’과 ‘적확한 어휘로 표현할 능력’을 잃는다. 그리고 이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합리적 사유와 행동이다. 말레나는 생각할 줄 알고 말할 줄 안다. 법정에서 그녀가 자신을 변호한 말은 이치에 맞고 반박할 여지가 없다.
사진출처. IMDb
사진출처. IMDb
말레나는 유일하게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인물이자, 대중에 휩쓸리지 않은 인물이다. 유감스럽게도 마을 사람 중 누구도 자신을 돌아볼 힘을 잃었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침묵함으로써 폭력에 가담한다. 마을 사람들이 말레나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 있다.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이유는 개인이 대중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대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의 구조는 언제나 동일하다. 피해자가 먼저 정해지고, 그들을 처벌할 죄가 만들어진다. 죄가 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벌이 사후적으로 죄를 만든다. 남자들은 더러운 욕망을 불러일으킨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운다. 여자들은 ‘함부로 다리를 벌린’ 죄를 물으며 도덕이란 프레임으로 그녀를 응징한다.

레나토는 자신이 말레나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라 믿는다. 그는 말레나를 감시함으로써 남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마을 사람들의 편견이 터무니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레나토 역시 말레나를 대상화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말레나를 구원하는가 하면, 변호사에게 겁탈당한 말레나를 마음대로 ‘용서’한다. 레나토의 순정 역시 마을 남자들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레나토의 상상 / 사진출처. IMDb
레나토의 상상 / 사진출처. IMDb
영화는 말레나가 겪는 비극의 표면만을 보여준다. 말레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동은 관객이 유추하게끔 내버려둔다. 영화는 말레나의 속내를 끝내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이 보는 것은 오직 인물들이 각자의 욕망으로 만들어낸 말레나의 상(想)뿐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고뇌하고 갈등하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입체적 인물을 배제한 이유는 군중심리와 파시즘에 휩쓸려 ‘하나’가 된 대중의 모습을 부각하려는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의도다.

말레나를 보호할 ‘남성의 권위’는 부재한다. 말레나의 남편은 전쟁터로 끌려갔고, 아버지는 폭격으로 사망했다. 말레나의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다. 듣지 못함은 소통의 부재를 상징한다. 그는 딸의 해명을 듣지 않음으로써 대중의 편에 선다. 영화는 힘없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를 전쟁이라는 구조적 폭력과 겹쳐 놓는다. 남편의 사망 소식 후 말레나는 카데이 중위와 교제했으나, 그는 스캔들에 연루되기 싫어 사랑을 부정했다. 궁여지책으로 자신을 강간한 변호사와 결혼하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성이다. 마을 사람 중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가족과 마을, 파시즘이라는 권위에 의존해 살아간다.

배급도 연금도 끊긴 말레나는 생존이 곤란해진다. 남성들이 도움의 대가로 원한 것은 늘 말레나의 몸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자를 때, 그녀의 마음에 남아있던 순수성과 결벽도 함께 잘려 나간다. 짧은 머리를 붉게 물들인 말레나는 몸매를 드러낸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선다. 다리를 꼬고 앉은 말레나가 담배를 꺼내 물자, 남자들이 앞다투어 불을 붙여준다. 이 유명한 장면에서 모니카 벨루치는 눈빛만으로 말레나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다.
영화 <말레나>의 라이터 샷 / 사진출처. IMDb
영화 <말레나>의 라이터 샷 / 사진출처. IMDb
말레나는 매춘부가 되어 대중이 그녀에게 투사하던 모습을 현실화한다. 이는 대중에 대한 굴복인 동시에 가장 냉혹한 방식의 복수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건, 대중은 이미 말레나를 매춘부로 대했다. 하지만 말레나는 이제 단순한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이용해 살아남기를 택한다. 그녀가 고른 상대는 마을을 점령한 나치 장교였다. 대중이 감히 닿을 수 없는 권력의 심장부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말레나는 여전히 그들 위에 선다.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여성들이 앞다투어 말레나의 옷을 찢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이 폭력은 정의의 이름을 쓴 린치이며 도덕의 탈을 쓴 질투다.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지만, 여성 역시 파시즘에 동조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한다. 말레나에 대한 응징은 이중의 층위를 지닌다. 여성의 정절을 심판하는 같은 여성의 심판이자,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말레나의 아름다움이 지닌 영향력과 그녀가 누린 것으로 오해받는 향락—에 대한 질투다.
린치당하는 말레나 / 사진출처. IMDb
린치당하는 말레나 / 사진출처. IMDb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헐벗은 가슴은 더는 에로틱한 이미지가 아니다.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말레나의 비명은 마을 남성들을 향한다. 각각의 남성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폭력을 만들어낸 남성 권력에 대한 절규다. 말레나의 몸에 흐르는 피에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든 관여했다. 직접 나서 돌팔매질하거나,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죄의식을 덮는 유일한 방법은 걸어 다니는 증거, 곧 피해자를 영원히 입 다물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레나에 대한 대중의 죄의식은 폭력으로 치환된다.

말레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을을 떠난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자, 레나토는 그에게 그간의 진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편지에 서명함으로써 레나토는 익명의 대중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한 통의 편지가 과연 무엇을 복원할 수 있을까? 말레나가 겪은 수년간의 고통을, 마을 전체의 공모를 소급하여 지울 수는 없다. 레나토의 성장은 개인의 각성이 지닌 가능성인 동시에, 그 각성이 얼마나 늦고 미약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양가성이 지닌 의미를 그대로 남겨둔다.

마을에 돌아온 말레나에게 레나토는 진심을 담아 행운을 빈다. 이제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몸에만 머물지 않는다. 레나토는 말레나를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 아닌 전인(全人)으로 본다. 비로소 레나토는 한 명의 남성으로 성장한다. 그의 성장은 파시즘에서 벗어난, 개인으로서의 변모를 상징한다. 친구 무리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안다. 성장이란 반바지를 벗고 긴 바지를 입거나, 여성과 동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과 마을에 돌아온 말레나 / 사진출처. IMDb
남편과 마을에 돌아온 말레나 / 사진출처. IMDb
시칠리아의 푸른 바다에 떠도는 윤슬, 반짝거리는 햇볕, 거대한 오브제 같은 흰 암석과 갈매기 떼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관객의 눈을 시리게 한다.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특유의 영상미로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유장함을 보여준다. 모니카 벨루치의 처연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레나의 내면을 관객에게 전한다.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풍경 / 사진출처. IMDb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풍경 / 사진출처. IMDb
누가 말레나를 지옥 속으로 밀어 넣었는가. 말레나의 등을 떠민 사람은 특정한 악인이 아니다. 침묵한 애인, 외면한 아버지, 질투한 여성들, 그리고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녀를 훔쳐본 레나토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 역시 폭력의 공모자가 된다. 확대경을 든 아이들은 개미를 태우며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확대경의 초점은 언제든 우리를 향할 수도 있다. 말레나가 겪은 야만은 80여 년 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우리 안의 파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이수정 문화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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