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거짓말처럼 날씨가 잔잔해졌다. 우리는 눈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느덧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장시간의 거친 여정과 사나운 눈보라를 견뎌낸 뒤 마주한 지구 북쪽의 밤은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했다. “저 언덕 너머에 오로라가 보여요.” 오로라 가이드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기대와 달리 옅은 무언가의 잔상에 불과했던 그것이 우주의 신비인지 흩어지는 구름의 모습인지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몇 시간을 달려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어렴풋이 마주한 오로라의 흐릿한 잔상에 만족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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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잠깐 햇빛 비치는 짧은 낮의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혹시나 오늘은 진짜 오로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제의 아쉬움을 서로 얘기하는 중, 어제의 오로라 헌팅을 안내해 준 가이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은 매우 좋은 징조가 보이며, 마침 빈자리도 있다는 소식을. 우리는 고민할 것 없이 후다닥 다시금 설렘을 안고 오로라 사냥을 떠났다.
어두운 저녁, 차가 출발하니 이내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설마 이번에도 기나긴 여정 끝에 아쉬움만을 남기고 돌아가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던 찰나, 풍파가 잦아들고 대지가 숨을 죽였다. 출발한 지 얼마 이동하지 않은 그때, 창밖의 하늘은 비로소 초록빛 비단 커튼을 드리웠다. 우리 모두 바로 차에서 내려 모든 조명을 끄고 그 거대한 ‘빛의 강’이 굽이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벨리우스가 머리 위로 비상하는 백조들의 모습에 환희를 느껴 쓴 5번 교향곡 3악장의 찬가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거대한 오로라는 풍파 끝에 마주한 찬란한 응답이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3악장]
몇 년이 흘러 그날 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단둘이 여행한다. 그사이에 많은 일들을 겪은 듯하다. 부모가 되었고 전염병에 세계가 멈추기도 했었다. 오타루의 지역 술인 다나카 주조에서 빚은 니혼슈(일본식 청주) ‘타카라가와’(宝川) 한 잔을 따르며 그날을 생각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추억한다. 찬 공기를 느끼며 일찍 저물어 가는 석양빛을 뒤로한 채 살짝씩 흩날리는 알록달록한 단풍을 보며 잔을 기울인다. 오랜만에 둘이서 종일 걸어 지친 몸에 목을 타고 넘어가는 니혼슈, 오로라의 투명한 신비와 닮은 타카라가와 한 모금이 들어온다. 텐구야마(텐구산)의 눈 녹은 물이 ‘보석이 흐르는 강’, 타카라가와라는 그 이름처럼 내 안에서 ‘보석 강’이 되어 흐르는 듯하다. 밖의 풍경과 어우러져 트롬쇠 여행 때 보았던 하늘의 ‘빛의 강’이 더욱 선명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