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의 도시, 홋카이도 오타루에서의 술 한잔에 몇 년 전 여행의 신비하고 웅장했던 기억들이 차오른다.
영화 '러브레터'. / 사진. © IMDb
영화 '러브레터'. / 사진. © IMDb
어쩌면 계획을 했던 여행이고, 어쩌면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무언가를 향한 충동적인 떠남이었다. 그해 1월 아내와 나는 오로라를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북극권에 인접한 노르웨이 북단의 도시 트롬쇠(Tromsø)로 향하였다. 오로라 헌팅을 나선 여행객들은 저녁 7시 무렵 모여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깊은 오지로 ‘사냥’을 시작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몇시간을 달렸을까 갑자기 만난 눈보라는 가차 없었다. 6명의 여행객을 태운 작은 승합차는 바람에 흔들리고 미끄러졌다. 빛을 쫓던 여행객들은 어느새 북극의 혹독한 날씨에 방향을 잃은 방랑자에 가까웠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거짓말처럼 날씨가 잔잔해졌다. 우리는 눈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느덧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장시간의 거친 여정과 사나운 눈보라를 견뎌낸 뒤 마주한 지구 북쪽의 밤은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했다. “저 언덕 너머에 오로라가 보여요.” 오로라 가이드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기대와 달리 옅은 무언가의 잔상에 불과했던 그것이 우주의 신비인지 흩어지는 구름의 모습인지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몇 시간을 달려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어렴풋이 마주한 오로라의 흐릿한 잔상에 만족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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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잠깐 햇빛 비치는 짧은 낮의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혹시나 오늘은 진짜 오로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제의 아쉬움을 서로 얘기하는 중, 어제의 오로라 헌팅을 안내해 준 가이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은 매우 좋은 징조가 보이며, 마침 빈자리도 있다는 소식을. 우리는 고민할 것 없이 후다닥 다시금 설렘을 안고 오로라 사냥을 떠났다.

어두운 저녁, 차가 출발하니 이내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설마 이번에도 기나긴 여정 끝에 아쉬움만을 남기고 돌아가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던 찰나, 풍파가 잦아들고 대지가 숨을 죽였다. 출발한 지 얼마 이동하지 않은 그때, 창밖의 하늘은 비로소 초록빛 비단 커튼을 드리웠다. 우리 모두 바로 차에서 내려 모든 조명을 끄고 그 거대한 ‘빛의 강’이 굽이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벨리우스가 머리 위로 비상하는 백조들의 모습에 환희를 느껴 쓴 5번 교향곡 3악장의 찬가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거대한 오로라는 풍파 끝에 마주한 찬란한 응답이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3악장]

몇 년이 흘러 그날 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단둘이 여행한다. 그사이에 많은 일들을 겪은 듯하다. 부모가 되었고 전염병에 세계가 멈추기도 했었다. 오타루의 지역 술인 다나카 주조에서 빚은 니혼슈(일본식 청주) ‘타카라가와’(宝川) 한 잔을 따르며 그날을 생각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추억한다. 찬 공기를 느끼며 일찍 저물어 가는 석양빛을 뒤로한 채 살짝씩 흩날리는 알록달록한 단풍을 보며 잔을 기울인다. 오랜만에 둘이서 종일 걸어 지친 몸에 목을 타고 넘어가는 니혼슈, 오로라의 투명한 신비와 닮은 타카라가와 한 모금이 들어온다. 텐구야마(텐구산)의 눈 녹은 물이 ‘보석이 흐르는 강’, 타카라가와라는 그 이름처럼 내 안에서 ‘보석 강’이 되어 흐르는 듯하다. 밖의 풍경과 어우러져 트롬쇠 여행 때 보았던 하늘의 ‘빛의 강’이 더욱 선명히 떠오른다.
오타루 지역 술 니혼슈 타카라가와. / 사진. © 지중배
오타루 지역 술 니혼슈 타카라가와. / 사진. © 지중배
돌이켜보면 삶에서의 행복은 대개 식별하기 어려운 희미한 전조로 찾아온다. 오로라 헌팅 첫날의 눈보라와 긴 여정, 그리고 설명 없이는 오로라인지 구름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웠던 그 희미한 빛이 실은 거대한 환희를 만나기 위한 전조였음을 나는 이제 안다. 차가운 눈 녹은 물이 ‘보석 강’이 되어 흘러 몸을 따뜻하게 적셔 주듯, 어떤 눈보라가 다시 길을 막을지라도 바람이 잦아든 자리에는 어김없이 더 눈부신 ‘빛의 강’이 흐르리라는 것을 믿는다.

지휘자 지중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