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피츠버그에 첫눈이 내렸다. 20세기 초 철강 산업의 메카였던 이 도시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남긴 문화 예술의 씨앗 덕분에 산업의 쇠퇴 이후에도 의료, 교육, 문화의 도시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뤄냈다. 이러한 피츠버그의 문화적 저력 덕분에 펜실베이니아에는 동쪽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서쪽의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PSO)까지, 두 개의 음악적 중심이 세워졌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차로 5시간이지만, 미국 50개의 주에서 이처럼 한 주 안에 정상급의 오케스트라가 두 개나 있다는 사실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고 바로 첫눈이 내린 그날,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Op. 43'을 조성진과의 협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사진출처. unsplash피츠버그 하인즈 홀(Heinz Hall)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하인즈 홀(Heinz Hall)은 일반적인 공연장과 달리 단일 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0년 영화관으로 문을 연 이곳은 1967년 철거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때 케첩으로 유명한 하인즈 가문의 후원과 지역 사회의 지지가 더해져, 3년의 대공사 끝에 피츠버그를 대표하는 콘서트홀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콘서트홀에 맞는 음향 설비와 내부 공사는 당시 돈으로도 약 10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고 하니, 예술의 공적 가치를 이해하는 후원과 지지가 문화산업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2025.12.02 하인즈 홀 투어,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콘서트 홀 / 영상=필자 유튜브]
카네기 홀 프리뷰
이날의 공연은 PSO가 11년 만의 카네기 홀 복귀를 하루 앞두고, 피츠버그에서 먼저 선보이는 상징적인 무대였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으로 두 개의 그래미 상을 수상한 PSO답게, 가장 자신 있는 레퍼토리를 전면에 내세웠고, 여기에 조성진이라는 파트너를 영입하여 카네기 홀 재입성을 위한 완벽한 라인업을 완성했다.(조성진은 2026년 4월 12일, 카네기 홀 단독 리사이틀 또한 예정되어있다)
PSO의 음악감독 만프레드 호네크(Manfred Honeck 1958~)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빈 필하모닉의 비올라 단원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다. 콩쿠르 스타나, 유명 솔리스트 출신이 아닌 그는 오케스트라 내부에서 천천히 기초를 쌓아 올려 음악 감독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작품의 본질을 새롭게 드러내는 독창적인 해석으로 유명한 호네크는 PSO에서 18년째 음악 감독을 맡고 있으며, 그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는 예술적 성장을 거듭하며 피츠버그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지휘자 만프레드 호네크(Manfred Honeck)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PSO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악보의 세밀한 지시 하나 놓치지 않는 호네크 다운 선명한 사운드로 구조적 긴장을 차분히 쌓아 올리는 연주였다. 그리고 그 긴장은 마지막 4악장에서 압도적으로 터져 나오지만, 그 환희는 결코 승리의 음악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교향곡 4번 발표 이후 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의 숙청 위기에 몰리게 된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이 교향곡 5번을 발표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스탈린이 요구한 승리의 찬가라는 이름 아래, 강요된 충성심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논란의 곡이기도 하다. 호네크는 이 장엄한 사운드 속에 감춰진 슬픔을 놓치지 않았고, 폭발적인 에너지 속에서 드러나는 그 비통함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d단조, Op. 47: 제1악장]
※ 2·3·4악장은 맨 아래 링크2) 첨부되어 있습니다.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나에게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피아니스트 티엔쉬1)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연주곡이 변경되는 돌발 상황을 담은 쇼츠로 먼저 기억된 작품이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실제 연주로는 처음 듣게 되면서, 작품의 배경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는 19세기 초 유럽 음악계를 충격에 빠뜨린 인물이었다. 그의 연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테크닉으로, 악마적이라는 표현이 따라다닐 만큼 대단했다. 그는 연주자의 한계를 시험하는 24곡의 카프리스(독주 악기를 위한 고난도 기교곡)를 남겼고,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중 마지막 24번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 명확한 리듬과 구조 덕분에 수많은 작곡가들의 '변주 주제'로 사랑받아왔다. 브람스 역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35 (피아노 독주)를 남겼지만, 고난도의 기교곡 성격이 강해 연주 빈도가 비교적 낮다. 반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협주곡 형식과 풍부한 서정성 덕분에 많은 연주자들의 레퍼토리에 올라있는 작품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을 주제로 한 단악장 변주곡이다. 협주곡 형식을 빌려오면서도, 장면 전환이 빠르고 감정이 자유롭게 뒤섞일 수 있는 랩소디 형식을 선택하여, 아이러니와 유머, 그리고 서정성을 교차시켰다. 화려하고 강인한 기교, 때로는 냉정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도, 가장 유명한 18번 변주에 이르러서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서정성이 그 정점을 이룬다.
이날 조성진의 연주는 기술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을 뿐 아니라, 명확한 구조 속 곳곳에 숨겨진 어두운 정서를 섬세하게 끌어올렸다. 격렬한 에너지로 몰아붙이다가도 어느 순간 유연하게 물러서는 그의 연주는 긴장과 이완을 과장 없이 조율해 나갔다. 특히 18번 변주에서는 연주의 밀도를 조절하는 그의 흐름에 따라, 마치 시간마저 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성진 -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연주 후 커튼콜 / 영상=필자 유튜브]
1박 2일의 음악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전날 내린 첫눈은 땅의 온기에 녹아 사라지고, 나뭇가지 위 남아 있는 눈만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고요한 겨울 풍경은 장거리 운전에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었고, 어제의 감흥을 떠올리는데도 훌륭한 길동무 역할을 해주었다.
여행을 결정하고 계획하는 시간들은 늘 설레인다. 하지만 출발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처리해야 하는 밀린 일들, 아이들 라이드부터 강아지 밥까지... 사소한 걱정들이 앞다투어 머릿속을 점령한다.
그렇지만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에게 이 모든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를 납득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결국 모든 여행은 귀찮음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 특히 음악과 함께라면 더욱 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