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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옷의 이자벨 아자니 “절대 선, 절대 악은 없지만, 나를 악녀라 불러도 좋아.”
[arte] 이수정의 영화 속 악녀들
체제와 본능, 억압과 욕망, 이성과 광기
이원성의 세계를 의심하며 고발하는 영화 <포제션>
'악녀'는 누구인가
체제와 본능, 억압과 욕망, 이성과 광기
이원성의 세계를 의심하며 고발하는 영화 <포제션>
'악녀'는 누구인가
1981년 작 <포제션>이 한국에서 첫 개봉을 맞이하기까지 44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이 저주받은 작품이 푸대접받기란 비단 우리나라에서의 일만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1999년에 이르러서야 상영 금지가 풀렸다. 미국에서는 40분 분량의 필름이 잘려 나간 채로 상영되는 수모를 겪었다. 핵심적 장면을 난도질당한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을 리 없다. 오랜 시간 이 영화는 ‘싸구려 삼류 영화’라는 언론의 혹평을 받았다. 세월의 흐름 덕분일까.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컬트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를 칸 영화제 당시의 감독판으로 온전히 감상할 기회가 주어졌다.
영화의 배경은 냉전 시대의 베를린이다. ‘벽은 무너져야 한다’라는 문구가 동서를 가르는 장벽에 쓰여 있다. 이 장벽은 단지 물리적 경계가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분할선이자 인간 정신의 분열을 상징하는 메타포다. 단절된 체제는 단절된 인간관계로 이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실상 독백에 가깝다. 소통은 끝없이 미끄러지고 의미 없는 말들이 허공을 맴돈다. 모든 상황이 빚어내는 부조리함에 관객은 실소를 터뜨린다. 마크(샘 닐)의 명령을 받은 택시 기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부 기관 차량에 돌진한다. 총알 세례를 받은 마크와 안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일어선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광기란 이성이 만들어낸 타자’다. 영화에서 안나가 보여주는 광기는 이성적 질서가 억압한 것의 폭력적 회귀다. 안나는 말한다. “절대 선, 절대 악은 없지만, 나를 악녀라 불러도 좋아.”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원성의 세계-‘믿음’과 ‘기회’, 체제와 본능, 억압과 욕망, 이성과 광기-에 관한 의심을 함축한다. 안나는 오랫동안 ‘믿음’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가부장제가 구축한 규범, 당위, 도덕적 질서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했다. 안나에게 ‘기회’란 ‘믿음’의 안티테제다. ‘기회’란 규범 밖 욕망, 통제되지 않는 충동, 질서를 벗어나는 자유를 의미한다. 안나는 외도라는 ‘기회’를 통해 체제를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안나는 그 과정에서 믿음과 기회의 통합에 실패하고 만다. 그 균열, 봉합되지 않는 틈새로 그녀의 광기가 흘러 들어간다.
안나의 정부 하인리히는 ‘기회’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는 탐욕스러운 쾌락주의자이자 거칠고 강한 남성성의 화신이다. 하인리히는 가족이 있으며, 그에게는 가족이 늘 일 순위라고 말한다. 안나를 사랑한다면서도 정작 그녀를 삶의 주변부에 위치시킨다. 두 남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마크는 제도적 권위로, 하인리히는 육체적 쾌락으로—권력을 실현하지만, 안나를 소유물(possession) 취급하는 것은 동일하다. 마크와 하인리히는 안나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 체계에 포획함으로써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는 피와 살, 토막 난 신체가 난무한다. ‘그것’은 탐욕스럽게 시신의 조각을 소비하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한다. 유산으로 인해 생명력이 고갈된 안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광기와 분열뿐이다. 상처가 남긴 틈에서, 그 공백에서 ‘그것’은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 나간다. “그것은 내 안에 있어.” 안나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외부에서 침입한 존재가 아니라, 안나 내부에서 잉태되었다. 안나는 남성적 질서 바깥에서 자신만의 창조 행위를 수행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신성(神性)을 추구한다. 그러나 안나가 생산한 ‘그것’은 구원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에 가깝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 파괴와 살상이 일어나고, 시신이 즐비하다. 사이렌 소리와 짙어가는 어둠, 섬멸되는 빛이 세상의 몰락을 알린다. 안나가 만든 ‘그것’은 여전히 폭력으로 가득한 남성성의 세계에 속해 있다. 완성된 ‘그것’이 마크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안나의 창조 행위조차 남성적 원형에 속해 있었다는 암시다. 안나의 반역은 결국 그녀를 억압한 체제의 복제로 귀결된다. ‘그것’을 생산한 안나의 무의식은 여전히 이미 주어진 세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크와 안나의 아들 밥이 서서히 익사하는 광경을 카메라가 비출 때,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배신자가 발각됐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애초에 ‘믿음’과 ‘기회’라는 두 세계는 구분될 수 없다는 폭로다. ‘믿음’ 속으로 스며든 ‘기회’, 이성 안에 공존하는 광기, 질서 속에 도사린 혼돈. 안나의 광기가 마크의 세계에도 이미 내재했듯, 괴물과 인간, 혼돈과 질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영화가 내내 보여준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하는 장면이다.
열린 문들, 길고 구불구불한 복도, 끝없이 연결된 방과 방. 거대한 미궁과도 같은 영화 속 공간은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닮았다. 줄랍스키 감독은 관객을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광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방황하기를 요구한다. 그들이 겪는 자폐와 고뇌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영화는 불편하고 잔혹하고 불친절하다. 서사에는 구멍이 많고, 전개에는 개연성이 없다. 영화는 관객이 자신만의 독법으로 그 여백을 메우기를 바란다. 이 작품을 감독의 작가주의가 깊이 밴 ‘괴작’으로 볼지, 두 체제 사이에서 방황하던 안나의 자기파괴 서사로 볼지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이수정 문화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