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Der Kuss)>는 그림을 가득 채우는 인물만큼이나 색감이 인상적입니다. 특유의 정교한 화풍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금박으로 번쩍이는 의상인데요. 어느 날에는, 아마도 <키스> 속 인물이 착용한 옷은 단순한 격자무늬가 아닌 조각보(패치워크, patchwork)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조각보가 떠오른 것도 그즈음이었죠.

진짜 조각보 베개

가끔씩, 할머니가 자투리 천을 모아두었다가 만들어 주셨던 ‘진짜 조각보 베개’가 생각납니다. 어린이일 때나 지금이나 잠이 들지 않아 걱정했던 나날은 거의 없지만 그 조각보 베개는 유난히 기분 좋은 꿈을 꾸게 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다 조각보 베개 몇 개씩은 갖고 있겠지’ 싶었지만 그것이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다는 건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됐지만 말이죠.

베갯속에는 늘 폭신한 솜이나 메밀껍질이 들어있었는데요. 최첨단 소재를 접목시켜 형상을 복원하는 요즘 베개에 비해 어쩐지 잠은 더 잘 들었던 것으로 추억합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던 질감,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구수한 메밀 향을 느끼게끔 했던 할머니 베개의 백미는 바로 조각보 그 자체였습니다. 공예박물관에 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대량 생산된 조각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할머니의 조각보에 비할 바가 아니죠. 할머니의 조각보는 개성 있는 무늬로도 즐거움을 주었지만, ‘진짜 남은 천’을 활용해 기성품이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장인정신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건축의 입면과 창호(주로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파사드), 직조된 것처럼 복잡한 도시를 보면서 줄곧 할머니의 조각보를 떠올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조각보의 도시
부산 감천마을 / 사진. © 김현호
부산 감천마을 / 사진. © 김현호
다양한 매력을 지닌 한국의 도시 중에서도 ‘조각보의 도시’를 꼽는다면 단연 부산이 첫선에 꼽힐 것입니다. 서울의 옛 동네가 대부분 새로운 집합주택 단지로 개발되고 필지가 통합되는 것과는 달리 다행히도 부산에는 감천문화마을, 흰여울마을, 초량 이바구길 등 가파른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이 참 많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고마운 도시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랐던 많은 이들이 유난히도 가파른 언덕배기에 힘겹게 자리 잡으면서 이런 모습을 이룬 것이죠. 도시의 행정가와 자본이 관여하지 않았던 이 자연스러움은 오늘날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거대한 ‘조각보’가 됐습니다.

조각보의 도시에 조각보가 없다면 어떨까요? 만약 부산의 모든 마을이 재개발되어 옛 필지가 사라진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찾지 않게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바닷가마다 솟아오를 듯 건설된 집합주택이나 초대형 상업시설만으로는 도시를 채울 수 없는 법이죠. 아마도 알록달록한 조각보처럼 건설된 언덕의 마을들은 부산을 가장 부산답게 돋보이도록 해준 요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부산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마천루의 도시 대신 세월을 여러 겹으로 쌓아놓은 밀푀유(Mille-feuille, ‘천 겹의 나뭇잎’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의 디저트)나 무지개떡(상가와 주거 기능이 어우러진 건축 양식으로 건축가 황두진 선생의 표현을 인용) 건축을 선호할 듯합니다. 그리고 그 알록달록한 먹거리처럼 생긴 건축이 어우러져, 조각보처럼 산을 뒤덮고 있는 부산 고유의 모습에 탄성을 자아낼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계절마다 들른 부산의 조각보 마을은 종종 적당한 햇살을 받아 빛났는데, 특히 해 질 녘 풍경은 꽤나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짧아진 가을엔 일몰 전까지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뛰어다녔고, 한여름엔 한 손에 양산을 들고 옷이 땀으로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게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부산의 조각보’는 ‘할머니의 조각보 베개’만큼이나 늘 잠을 불렀습니다.

항구마다 펼쳐 놓은 조각보

항만 주변의 물류창고마다 쌓아 놓은, 반듯하지만 불규칙한 색깔의 모음인 화물용 컨테이너는 마치 조각보 같습니다. 산업 현장의 규칙과 약속에 따라 쌓아 놓았을 터인데 색상의 배합은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전 세계를 오가는 선박과 기차, 화물차들이 약속된 크기의 컨테이너를 쌓고 옮기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치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입체 조각보를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술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해야 할까요?
화물용 컨테이너로 쌓아 만든 조각보 / 사진. © 김현호
화물용 컨테이너로 쌓아 만든 조각보 / 사진. © 김현호
사실 화물용 컨테이너는 주로 활극 영화의 공간적 배경, 문학이나 이야기 속에서는 공식 통관 절차를 거치지 않은 물건을 몰래 옮기거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기 위한 장소로 종종 묘사돼 왔습니다. 주로 ‘밤의 컨테이너’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빛의 컨테이너’는 조각보에 가깝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중 하나인 <마인 크래프트>나 레고의 블록을 별다른 색상의 규칙 없이 쌓아놓은 것처럼 말이죠.

언젠가 화물용 컨테이너를 쌓아 둔 사진을 본 어머니와 아내는 “설치미술작품처럼 아름답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강박적으로 미장센을 추구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 속 배경으로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와 토마스 헤더윅의 조각보

‘초록·빨강·반짝이는 금빛의 조합’을 상상하면 누구라도 크리스마스를 떠올릴 것입니다. 어쩐지 크리스마스에는 이 세 가지 색상으로 엮은 디자인의 패치워크 스웨터를 입고 비슷한 모습의 담요도 한 장 덮고 있어야 할 듯싶습니다. 그런데 따뜻하기만 한 크리스마스에 왠지 비장함을 더해야 한다면 사카모토 류이치의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입부부터 맺음부까지 치밀하게 직조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이 곡이 마치 조각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단조롭지만 빼곡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의 내림 나단조 악보를 읽다 보면 영락없이 조각보가 생각납니다. 연주를 할 때마다 마치 방직기로 씨실과 날줄을 교차시키거나 다양한 모양의 조각 천을 잇는 기분이 들기도 하죠.
서울 송현동에 위치한 토마스 헤더윅의 '휴머나이즈 월' / 사진. © 김현호
서울 송현동에 위치한 토마스 헤더윅의 '휴머나이즈 월' / 사진. © 김현호
이번 겨울엔 이 음악을 들고 송현동에 가보시면 어떨까요? 지난가을,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토마스 헤더윅이 서울 송현동에 금속 조각보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조각보의 이름은 ‘휴머나이즈 월(Humanise wall)’입니다. 건축가가 『더 인간적인 건축』 등을 통해 꾸준히 강조해온 화두처럼 이 설치 작품은 ‘인간적인 건축, 사람을 위한 도시’라는 주제에 따릅니다. 1,428장에 달하는 금속 강판을 조각보처럼 엮어 만든 구조물인데요. 우리의 삶이 꼭 이 철제 조각보를 닮았습니다.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누빔으로 엮은 조각보처럼 우린 늘 예상치 못한 도전과 모험을 마주하게 됩니다.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이 바로 인생일 터입니다. 그저 규칙 없이 아름다운 조각보의 도시, 건축, 음악을 떠올리며 일몰을 즐기게 되는 저녁입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 -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 출처. Ryuichi Sakamoto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