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도 꽃 같아서 화려한 절정 지나면 추레하니 쓸쓸함만 남는다. 세상 모든 발화는 한때다.
얼마전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 다녀왔는데, 제때를 지난 단풍의 분분한 낙화를 마주했다. 동행한 선생님이 없었다면 여러번 소리 내어 탄식했을 것이다.
지금 열리고 있는 <향수, 고향을 그리다> 전시는 근대 작가들의 다양한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근현대 미술에 담긴 고향의 역사를 아울렀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사무치는 그리움도 없고 시골의 풍경도 낯선데, 향수는 구체가 아닌 관념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선지 전시를 보러온 사람들 연령대도 높았다. 어쩌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그리고 나도 2025년을 정리하는 그림 한점을 골라보기로 마음 먹었다. 올해 어떠했더라. 세상은 출렁거렸고 사람들도 어딘가 내내 불안했다. 정치와 소문은 멀수록 좋다했는데 어딜가나 세상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마음은 간절히 평화를 바랐다.
향수와 고향이 키워드여서 따뜻한 그림 일색일 줄 알았더니, 우리의 아픈 근대사가 다 들어있다. 일제 강점기, 전쟁, 이념 갈등, 그럼에도 계속되어온 우리의 삶, 사랑, 그리움. 이제 아픈 것들은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됐다. 몇몇 작품은 너무 먹먹해서 한동안 그림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전시 관람이 끝나고 동행한 선생님이 핸드폰으로 찍은 그림 사진을 넌지시 보여주셨다. 한 소년이 나무에 기대어 피리를 불고 있다. 폐허가 된 곳에서 울려퍼지는 피리 소리는 쓸쓸하고 처연하기 그지 없다. 박돈 작가의 ‘성지’였다.
그림으로 두어시간 수다를 잔뜩 떨었다. 우리는 말해야 한다. 유년의 불안과 청소년기의 슬픔, 청년의 실패와 중년의 미완까지, 솔직하게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2025년의 그림으로 윤중식 작가의 ‘평화’를 골랐다. ‘환희’라는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는데, 올해 내내 그 생각을 하며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완벽한 송년을 보내는 이 방법을 강력 추천드리고 싶다. 어디든 편한 마음으로 미술관에 가시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해의 그림 한 점을 고르는거다. 힘들면 힘든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애썼다면 애쓴대로, 그림으로 올해를 정리해 주는거다. 더불어 올해의 책 한 권, 음악 한 곡을 골라보는 것도 좋다. 내가 고른 그들을 통해 나의 1년, 나의 삶이 의미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 잘 정리하고 새해로 넘어간다면, 발화의 시간은 다시 찾아올지니, 송년의 공허쯤 능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