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으로 향하던 배가 얼음에 갇혔다. 선장과 선원들은 힘을 다해 보지만 두꺼운 얼음은 도무지 배를 내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지쳐 있던 그날 밤, 3㎞ 전방에 폭발이 발생하고 선장과 몇몇이 현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남자는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를 배로 옮긴 선장은 뒤이어 나타난 거구의 사내로부터 남자를 넘기라는 요구를 받는다. 총을 맞아도 끄떡없고 엄청난 힘을 가진 사내는 심지어 배를 밀기까지 한다. 위협을 느낀 선장은 사내의 발아래 얼음을 총으로 쏘아 그를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깨어난 남자는 선장에게 자신을 그 사내에게 넘기라고 말한다. 그가 다시 와서 모두 죽일 거라고, 그건 죽지 않는다고 말하며 남자는 두려움에 떤다. 그의 이름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렇게 빅터는 선장에게 자신과 크리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시작된다.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Ken Woroner / Netflix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Ken Woroner / Netflix
알려진 것처럼 19세의 메리 셸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바이런의 별장에 지인들과 모여 있다가 자기만의 무서운 이야기를 써보자는 바이런의 제안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뭔가 모두가 오싹해 할 만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메리는 퍼시와 바이런이 갈바니즘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듣다가 영감을 얻어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한다. 그렇게 쓰인 소설은 후에 최초의 SF소설로 회자되고 있고 수많은 문화콘텐츠의 원전이 되었다.

하지만 당대에는 저자가 나이 어린 여성이라는 점을 들어 어린 여성의 병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식의 폄하가 있었고 공포문학 자체가 인정받지 못한 데다가 SF 장르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라 이 소설의 가치는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프랑켄슈타인>이 얼마나 많은 층위를 가지고 있는지. 크리처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묻기도 하고 원초적인 공포를 선사하기도 하며 그렇게 태어난 크리처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 사고하게 한다. 우리는 메리 셸리가 창조해 낸 크리처를 보면서 혐오와 동정을 느끼고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인간이 아닌 존재이지만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지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해 언캐니 밸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역겹고 그래서 가엽다.

이름도 없는 크리처는 인형, 로봇, 인조인간 또는 좀비 등으로까지 이어진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과 닮은 형상을 지어오지 않았던가. 대표적으로 인형. 인형은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다. 인간의 감정을 받아내고 투영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형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카라쿠리일 것이다. 움직이는 자동인형. 그것은 인간의 호기심과 능력을 시험해보려는 실험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물이 인간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느껴질 때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의 영역인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일 자체가 인간의 도전이자 오만이며 희망이 아닌가.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Ken Woroner / Netflix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Ken Woroner / Netflix
어쨌든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어쩌면 그 자신은 크게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엄청난 이야기의 원전이 되었고 이 소설에서 파생된 이야기는 변주와 재해석을 거듭하며 계속 진화해 오고 있다.

메리 셸리의 크리처를 소재로 한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감독이 기예르모 델 토로이기에 개인적으로는 더욱 기대가 되었다. 그의 전작들을 떠올려 보라. 기괴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의 요정 판, <헬보이>의 헬보이,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낯설고 아름다운 생명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등에서 그는 다른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존재들은 우리의 신화와 민담, 전설 속에 숨어 지내며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는 존재들로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온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 존재들은 친밀하면서도 낯설고 매혹적이면서도 무섭다.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신비롭지만 공포스러운 것이다.

연출작은 아니지만 기획에 참여했던 <스플라이스>도 주목해 볼 만 하다. 과학자 부부가 만들어낸 크리처 드렌은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존재로 보인다. 파충류, 양서류, 조류, 포유류 할 것 없이 모든 종을 섭렵해 장점만을 뽑아내 ‘만들어낸’ 존재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드렌의 창조자인 부부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생각해보면 <스플라이스> 또한 <프랑켄슈타인>의 21세기판 변주곡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Netflix, 출처. IMDb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Netflix, 출처. IMDb
다시 돌아와서, 기예르모 델 토로가 기이한 상상의 존재를 여러 차례 그려냈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기대했다는 것보다는 그가 내보이는 연출의 힘을 믿었고 더불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어떻게 재해석했을지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 기예르모 델 토로.

메리 셸리의 원작을 크게 비틀지 않고 조금씩의 변주를 주면서 알고 있던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는 <프랑켄슈타인>은 크리처에 대한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 혐오를 느끼기 전에 크리처의 탄생과 빅터의 태도에 거리를 두면서 관찰하고 생각하게 한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이미 다음 칼럼은 ‘프랑켄슈타인’을 쓸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몇 편의 영화와 이토 게이가쿠와 ‘그의 문학적 맹우인’ 엔도 조의 소설 <죽은 자의 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관람 후 나의 생각은 오히려 <블레이드 러너> 쪽을 향하고 있었으니.

4년의 기한으로 ‘만들어진’ 리플리컨트. 인간의 육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과 전쟁 등을 대신하도록 하기 위해 생산된 그 기계들 중 몇몇이 몰래 지구로 돌아온다. 겉으로 보아서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들. 인간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스스로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리플리컨트를 남몰래 제거하는 임무를 지닌 형사 데커드. SF 영화의 걸작일 뿐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영화의 종반부, 자신의 ‘창조주’ 타이렐 박사를 찾아간 리플리컨트 로이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리플리컨트라는 ‘존재’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하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만 듣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져 인간을 대신하도록 설계된 리플리컨트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간절히 인간이 혹은 인간과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겠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주는 그들에게 냉담했고 결국 자신의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한다.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Netflix, 출처. IMDb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Netflix, 출처. IMDb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또한 그런 ‘인간-창조주’와 ‘크리처-피조물’의 관계를 맺고 있다. 자신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탄생된-만들어진 존재일 뿐인 크리처.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그저 ‘빅터’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던 그 크리처는 그러나 점점 엄청난 재생능력과 힘, 그리고 지능과 감정까지 가지게 되면서 빅터에게 엄청난 혐오와 경멸을 안겨 준다. 그럴수록 빅터의 마음을 갈구했지만 크리처는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고 대신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과 함께 불멸의 삶을 살아갈 파트너를 만들어달라고 하지만 그조차도 얻어내지 못한다. 결국 홀로 불멸의 삶을 살게 된 크리처는 고독과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가위손>도 프랑켄슈타인의 계보에 넣을 수 있다. 마을의 외딴곳에 있는 성. 그곳에는 늙은 천재 과학자가 실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실험이 완성되어 가위손을 단 크리처가 탄생한다. ‘가위손’은 외로운 박사의 다정한 가족이 되었지만 박사가 숨을 거두고 홀로 성에 남게 되고 우연히 그를 발견한 펙은 그, 에드워드를 마을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된다.
영화 <가위손>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가위손>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사람들의 관심과 친절을 한 몸에 받던 에드워드는 아주머니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고 정원을 손보며 어울려 지내지만 질투로 인한 오해를 받게 된 에드워드는 결국 배척당한다. 인간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인간이 아닌, 인간일 수 없는 20세기판 프랑켄슈타인은 인간 사이에 자리할 곳이 없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데이빗도 떠올려 보자. A.I.의 봉사 덕분에 살아가는 근미래의 인류. 감정을 가진 로봇 데이빗이 로봇 회사의 직원에게 입양된다. 그 직원 부부의 아들은 불치병에 걸려 냉동된 상태로 치료약이 개발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 아들을 대신해 입양이 된 것이다.

부모는 실제 인간 아이와 똑같은 데이빗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지만 데이빗은 아들의 대체품이었을 뿐 아들이 퇴원하면서 데이빗은 버려진다. <피노키오>의 21세기식 변주였던 이 이야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로봇의 이야기를 그려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든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이든 <가위손>의 에드워드나 데이빗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과 같아 보이지만 인간은 아닌 그래서 결국에는 언캐니 밸리의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인 존재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크리처인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아버지는 그 스스로 저지른 일로 끔찍함과 멀미를 느끼며 피조물을 거부하고 부인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금단의 행위로 속죄 제물이 된다.

당신은 이 크리처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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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Netflix, 출처. IMDb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 사진. © Netflix, 출처. IMDb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