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는 배우이다. 이상희를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희를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의 디즈니+ 드라마 <북극성>에서 주인공 서문주(전지현)의 보좌관인 여미지란 여성이 이상희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상희는 종종 짜증을 유발하는데, 가령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에서 주인공 로기완(송중기)이 벨기에의 정육 공장에서 일할 때 그가 동북 3성 출신이 아니라 탈북자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는 조선족 여자 선주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보면서 저 배우가 누군지 머리에서 계속 맴돌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희는 늘 그런 식이다. 그녀를 단박에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데 심지어는 영화나 드라마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나 되어야 아 그 여자가 이상희였지, 라고 뒤늦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이상희는 씬스틸러이다. 그리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 1983년생이고 40을 갓 넘긴 나이인데다 연기를 비교적 뒤늦게 시작했음에도(2010년 데뷔)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가 60편에 이른다. 영화는 가리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 이상희는 작품마다 없어서는 안 될 배우지만 그렇다고 출연 분량이 극 전부에 걸쳐 있거나 최고의 비중을 차지하는 그런 배우는 아니다. 자신을 독립영화계의 전도연이라 부른다지만 그녀는 언제부턴가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사이를 자유롭게 들고 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여자 권해효이거나 여자 김의성이다. 없어서는 안 되는 주연급 조연이다. 때로는 매우 특별한 단역이다. 늘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배우 이상희. / 사진 제공. 눈컴퍼니
2020년 가장 뛰어난 독립영화로 손꼽혔던 <국도극장>에서 이상희는 이름도 왕영은이란 캐릭터로 나오며 별별 연기를 다 선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극 중 영은은 먹고 살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쪼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가수 지망생이다. 영은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중국 음식점 서빙 일이다. 영은은 치파오를 입고 중국식 주전자를 요리조리 돌리며 물을 따르는 무술에 가까운 묘기를 선보인다. 이런 퍼포먼스 서비스는 1980~90년대 인천 차이나타운이나 서울 남대문, 부산 자갈치 시장에 있던 오래된 중국집 종업원들이 선보이던 것이었다. 이상희는 어디서 배웠는지(아마도 영화 들어가기 전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들처럼 짜장면 그릇을 돌리고 국자 돌리기를 하며 계란프라이 공중던지기, 주전자 물 붓기 퍼포먼스를 자유자재로 선보인다.
영화 속 영은은 주인공 기태(이동휘)의 고향 친구인데 사법고시에서 누구처럼(?) 9번 가까이 떨어진 그의 좌절 ‘따위’는 사는 데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벌교 사투리를 쏘아 댄다. <국도극장>의 배경은 벌교에 있는 재개봉관 극장 국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국도극장> 역시 이상희가 없었다면 에피소드에서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이음새가 부실했을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도 영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이럴 때 보면 씬스틸러의 원조 격인 유해진이나 성동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상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여자 유해진, 여자 성동일이다.
영화 '국도극장'에서 이상희.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이상희의 ‘미친 존재감’이 대중적으로 확실한 인장을 찍기 시작한 것은 데뷔 6년만인 <연애담>(2016)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장편 경쟁 대상을 받고 그 이듬해 들꽃영화상에서 신인배우상을 거머쥐었을 때부터이다. 들꽃영화상 위원장은 이상희가 포토월에 서서 기자들의 사진 세례를 받을 때 옆에 있는 공동위원장 달시 파켓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쟤, 누구지?” 이상희는 2015년에서 2017년의 제4회 들꽃영화상 시상식 사이 만 2년간 22편의 영화에 출연한 만큼 어떻게 그녀를 못 알아볼 수 있느냐는 핀잔을 듣기에 충분하지만 그건 그녀가 맡은 역할을 뒤져 보면 이해가 갈 만도 한 일이다.
또 다른, 주옥같은 독립영화 <철원기행>(2014)의 며느리, 하정우가 주연을 맡았던 장편 상업영화 <터널>(2016)에서는 24시간 뉴스 채널 방송기자로 나온다. 감독 김지운의 영화 <밀정>(2016)에서 이상희가 맡은 역할은 ‘애기 엄마’이다. 이상희는 실로 배역을 가리지 않는다. 유명 영화에서의 단역은 그녀가 생활비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5년 1편이 개봉됐던 <베테랑>에서 이상희가 맡은 역은 중환자실 간호사이다. 난동을 피우는 환자를 차갑게 제지하는 인물이다. 감독 류승완이 이렇게 회고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각본상엔 대사가 아예 없었는데 촬영하면서 대사를 했죠. (이상희가) 간호사 출신이라 자연스러운 연기가 필요해서 캐스팅했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이 나요.” 이상희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 서도철(황정민)이 소란을 피우니까 내모는 연기를 한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나가세요!”의 대사는 이상희가 즉석에서 만들어서 한 대사이다. 류승완의 또 다른 기억. “당시 이미 독립영화계에서 유명했던 배우였는데 작은 역할도 기꺼이 참여해줘서 매우 고마웠던 기억이 나고, 이 배우가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건 시간문제란 생각을 했었어요.”
이상희는 그런 걸 잘한다. 오래고 고된 일과로 늘 마음이 가라앉아 있고 나름 꽤 쌀쌀하며 목소리가 대체로 착 가라앉은 여자 말이다. 눈을 거의 아래로 살짝 깔고 상대를 바라본다. 정말 재수 없는 캐릭터지만 이 인물의 뒤 사연을 듣고 나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심지어 살짝 눈물까지 훔치게 되는 그런 감성의 연기에 있어 거의 최고봉 수준이다. 흔히들 메소드 연기, 메소드 연기하는데 이상희만큼 극 중 캐릭터 자체에 부착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도 드물다. 그녀는 그 인물 자체가 된다. 사람들이 그녀를 단박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 입에서 이름이 맴돌게 만드는 것은 순전히 온갖 인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마치 실제 인물이 그냥 영화 속에 들어 온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해대는 이상희 탓이다. 무너진 터널 앞에서 중계차 리포트를 하는 방송기자 모습일 때는 마치 그 방송국 개국 때부터 일해 온 진짜 방송기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감독들은 주연만큼이나 단역 연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이상희 같은 배우를 보물로 여긴다. 이제는 상당히 유명해진 친구인데 너무 작은 역할이라 뭐라 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녀가 마다하거나 꺼리는 걸 봤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배우 이상희. / 사진 제공. 눈컴퍼니
이상희 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된 <연애담>은 이상희의 첫 주연작이다. 퀴어 영화이다. 두 여성의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담겨 있다. 졸업작품을 준비 중인 미대생 윤주(이상희)는 지수라는 또 다른 여자(류아벨)에게 한눈에 빠져든다. 둘은 지극한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 윤주는 지수를 만나 가슴에 품고 있던 붕어빵 봉지를 내밀며 길에서 이걸 보면서 네 생각이 났어, 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먹는 거, 보는 거, 입는 걸 같이 하고 싶어 한다. 그 장면의 이상희는 사랑스러웠다. 이상희는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여자이다. 이 <연애담>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당시 국내에 개봉됐던 외화 <아뉴스 데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작은 영화 두 편은 주거니 받거니 쌍끌이로 독립 예술영화 애호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영화 '연애담'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상희의 최근 히트작(?)은 <세계의 주인>이다. 11월 13일 현재 독립영화치고 꽤 많은 1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이 영화에서 이상희는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주인공 이주인의 담임 선생 역이다. 씬이 제법 많다. 서너 씬에 등장해 톡톡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도 역시 선생은 이상희야, 라고 했다. 어떤 이는 이상희가 전직 선생이었다며, 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상희의 전직은 류승완의 얘기대로 수술실 간호사였다.
이상희 자신도 아마 자기가 누군지 잘 구분을 못 할 것이다. 꿈도 여러 역할로 꿀 것이다. 꿈속에서는 간호사가 돼 있는데 잠꼬대는 억센 조선족 사투리로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선생같이 차분하게 구는가 싶다가 어느새 차이나타운에서 접시돌리기 묘기를 선보이는 생뚱맞은 여자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많이 본 여인, 늘 들어 왔던 보이스의 여배우라고 생각된다면 주저 없이 아, 이상희구나 하면 될 것이다. 그녀는 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척척 해대면서 영화와 드라마에 스며들어서는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에 슬그머니 궁둥이를 붙이고 옆에 와 앉아 있다. 이상희는 우리 시대의 배우다. 배우가 꼭 주연만 하라는 법은 없다. 아니 주연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상희는 앞으로도 10년, 20년 우리의 인생과 함께할 배우이다. 바로 그 점이 이상희를 이번 여배우 열전의 목록에 올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