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처럼 모든 게 무너진 듯한 상황.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고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살갗의 따가움처럼 아프고 쓰립니다. 순간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 같은 걸 느꼈습니다.
이윽고 고통의 시간이 영롱한 물방울로 영글기까지 작가가 지나온 인생의 서사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예술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오래 남은 고통이 어떻게 맑은 물방울이 되었는지 말이지요. 물방울이 영롱할수록 오히려 더 짙은 슬픔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청년 김창열이 겪은 참혹한 전쟁의 상흔
“돌아보면 살아온 인생이 기적의 연속 같다.” 김창열의 생애를 조명한 단편 영화에서 작가가 넌지시 전한 한마디입니다. ‘인생이 기적의 연속’이라는 말은 기적이 필요했던 순간들이 숱했음을 담고 있습니다.
1929년생인 김창열은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열여섯 살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그는 화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우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6·25 전쟁의 참혹한 상흔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였습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해 데생, 해부학, 색채 등 서양 미술의 기초를 익히며 새로운 표현 세계에 매료되었지만,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은 중단되고 그는 징집되었습니다.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전쟁터를 겪으며, 중학교 동창 120명 중 절반인 60명이 전사하는 비극을 목격했습니다. 군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1951년 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로 발령받았지만, 그곳에서도 전쟁의 잔혹한 그림자는 여전했습니다. 당시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김창열은 그 한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1953년 서울로 전보될 때까지 ‘사이비 경찰관’이라 불리며 경찰 신분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혼란과 절망의 시대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청춘은, 훗날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문학지 『흑산호』에 시 세 편을 표지화와 함께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그중 「동백꽃」에는 상실과 순정의 정서, 그리고 훗날 물방울로 이어질 슬픔의 미학이 예감되어 있습니다.
“아아 이렇듯 이렇듯 사모친 연정이었으랴 네 피어린 충정을 내가 아노니 네 심언에 화살처럼 박힌 너를 안고 죽기로서 노래함이로다” 김창열, 「동백꽃」 (1950)
1965년 김창열은 김환기의 권유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그 무렵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이며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앵포르멜(Art Informel) 회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부상한 회화 사조로, 말 그대로 ‘형식이 없다’는 뜻의 ‘비정형’을 의미합니다. 김창열은 이 앵포르멜을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해 표현하고자 했지만, 뉴욕의 화단은 그에게 차가웠습니다. 생계와 고독이 예술혼을 조여왔습니다.
인생에서 자기 세계를 재건하는 시기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일과 비전, 자존감과 일상의 균형을 잡는 치열하고 고독한 시간. 누군가 곁에서 순간의 위로를 줄 수는 있지만 내 십자가와 같은 그 짐을 온전히 대신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고립과 좌절은 종종 도약의 시작이 됩니다. 형식 없는 예술에 매혹되었던 청년은 정작 뉴욕에서 자신만의 형식을 찾아야 하는 역설을 마주했습니다. 그는 앵포르멜이 추구하던 두터운 물감의 질감을 내려놓고, 정제된 화면 위에 기하학적인 색면을 그리거나 2차원 평면 속에 3차원의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착시 현상을 시도하는 등 새로운 조형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자신만의 대체 불가능한 스타일과 미학을 찾고자 하는 끈질긴 탐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1969년 뉴욕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정착한 김창열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파리 외곽의 마구간을 개조한 공간을 작업실로 삼았고, 재료비도 부족한 곤궁한 상황에서 캔버스를 다시 사용하곤 했습니다. 한번 사용해 늘어진 캔버스를 다시 팽팽한 상태로 만들려면 그 위에 물을 뿌려서 말려야 합니다. 그러던 1971년 어느 새벽, 캔버스 위에 맺힌 물방울이 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새로운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마음에 새로운 불씨가 자라납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바로 그 불꽃이었습니다. 그의 물방울은 단지 풀빛 위에 맺힌 아름다운 이슬이 아니었습니다. 총알이 관통한 살갗의 상처,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피와 점액의 흔적이었습니다. 물방울은 처음부터 고통의 기억이 응결된 형상이었습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방울을 집착에 가까운 정신적 강박으로 그려왔다. 내 모든 꿈, 고통, 불안의 소멸. 어떻게든 이를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며.” (김창열의 1990년대 자필 메모)
김창열의 물방울은 예술가가 겪는 인생의 서사와 맞닿아, 그 의미와 형상이 지속적으로 변화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던 중 문자와 물방울의 관계를 탐구하게 됩니다. 그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평안남도 맹산의 두메산골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살 무렵, 동양철학에 해박한 문인이셨던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비롯해 한자 교본인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천자문은 김창열에게 태어나 처음 접한 문자이자 세상을 인식하는 언어로 기억에 자리했습니다.
문자는 기억과 역사를 담아내고, 물방울은 한순간에 사라질 운명을 지닙니다. 이 둘을 오묘하게 결합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언어를 구사한 ‘회귀’ 연작을 펼쳐나갔습니다. 화폭을 촘촘하게 천자문으로 채운 뒤 그 위에 물방울을 얹듯 그린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문자 위에 덧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기억과 망각, 존재와 소멸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뿌리로 회귀하면서도, 여전히 고통을 씻어내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찬란한 고통의 물방울
50년 동안 물방울을 그린다는 것. 그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정화하는 기도이자 수행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바랍니다. 고통과 슬픔을 한 번 극복하면 영영 사라질 거라고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그 무게는 여전히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어제 용기를 냈던 일이 오늘은 다시 두렵고, 애써 씻어냈다고 생각한 슬픔이 아침 햇살과 함께 또다시 스며듭니다.
조심스레 상상해 봅니다. 위대한 예술가로 남은 김창열도 연약함을 지닌 사람이기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어제 한 점 물방울을 완성했다고 해서 오늘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다시 붓을 들었고, 또 한 방울을 그렸습니다. 50년 동안, 그렇게,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