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들 중에는 ‘독주가형’ 연주자가 종종 있다. 실내악에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고 솔리스트 활동에 전념하는 부류다. 20세기를 풍미한 두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4~1989)와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Nathan Milstein, 1903~1992)이 그러한 예였다. 누구보다 강렬한 개성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들은 조화로운 앙상블이 요구되는 실내악보다 명인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오케스트라 협연이나 리사이틀을 선호했다. 물론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처럼 밀스타인도 피아니스트와 리사이틀 무대에 섰지만, 그와 오랜 세월 함께했던 아르투르 발삼(1906~1994)은 밀스타인을 서포트하는 ‘반주자’에 가까웠다. 그만큼 두 카리스마 넘치는 거장이 젊은 시절 끈끈한 듀오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흥미를 자아낸다.
표지 속 밀스타인(왼쪽)과 호로비츠 / 사진. ⓒPublishing Solutions LLC">
도서 <"호로비츠는 나에게 형제와 같았습니다..." 나단 밀스타인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게 보낸 편지: 일상에서 창의성까지> 표지 속 밀스타인(왼쪽)과 호로비츠 / 사진. ⓒPublishing Solutions LLC‘혁명의 아이들’, 서방을 뒤흔들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연주하면 피아노가 부서진다.’ 하르키우를 찾은 17세의 밀스타인은 믿기 어려운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했다. 마침 소문의 주인공이 키이우에서 열린 밀스타인의 리사이틀에 찾아와 그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그곳에서 밀스타인은 호로비츠가 바그너의 <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주요 주제를 즉흥 연주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70년에 걸친 우정의 시작이었다. 밀스타인은 키이우에서의 두 번째 연주회가 끝나고 아예 호로비츠의 집에 눌러앉아 3년을 살았다고 한다.
곧 두 사람은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정부 신문에 듀오의 활약이 특필되고, 소련 당국이 이들의 연주회를 지원하게 됨에 따라 연주 여행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923년 모스크바에서 함께한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러시아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앞서 파리에서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1번을 세계 초연한 주인공도 이들이었다. 밀스타인은 그의 회고록 『러시아에서 서구로』에 이렇게 썼다. “호로비츠같이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곁에서 연주하면 오케스트라가 필요 없을 것 같다!”
정부는 ‘소련 혁명의 아이들’이라며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사회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했던 가족이 한순간에 몰락했으니, 혁명이 좋아 보일 리 없었다. 스승들과 동료들 또한 서방에서 경력을 쌓을 것을 독려했다. 호로비츠가 먼저 독일로 떠났고, 곧 밀스타인도 합류했다.
독일에서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은 러시아에서 망명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있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 1903~1976)를 만났다. 두 사람과 빠르게 친해진 피아티고르스키는 그들의 매니저를 따라 미국에서 솔리스트로 경력을 쌓기로 했다. 그렇게 러시아 출신의 세 대가는 ‘삼총사’로 불리며 서방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왼쪽부터) 밀스타인, 호로비츠, 피아티고르스키 / 사진. ⓒAlfred Eisenstaedt,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은 공히 전설적인 음악가로 일컬어지지만, 이들이 정점에 오르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1928년 카네기홀에서 열린 호로비츠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가 ‘대초원에서 온 회오리바람’ 등으로 불리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과 달리, 이듬해 미국에 데뷔한 밀스타인에게 이러한 떠들썩한 이벤트는 없었다. 호로비츠가 등장과 함께 누린 압도적 인기에 비하면 밀스타인의 성장세는 완만해 보였다. 밀스타인의 회고록을 공동 집필한 솔로몬 볼코프는 이로 인해 호로비츠와 밀스타인 사이에 서먹함이 생겼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긴장이 있었을지라도, 밀스타인이 호로비츠를 동료이자 음악가로서 존경했음은 분명하다. 밀스타인의 회고록은 친구의 비범함에 대한 극찬으로 가득하다. 뉴욕의 한 평론가가 호로비츠의 해석이 과장되었다고 이야기하자, 밀스타인이 맞받아쳤다. “그런 쩨쩨한 불평은 그만해요! 호로비츠는 그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아닙니다. 자연의 경이란 말입니다. 당신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물이 너무 많다고 트집 잡을 작정입니까?”
호로비츠는 우울증으로 장기간 공연을 중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두 번째 공백기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12년이나 이어졌다. 밀스타인은 이 시기에 호로비츠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무대에 돌아오도록 가까이서 독려했다. 그가 ‘볼로쟈(호로비츠의 애칭)’를 얼마나 아꼈는지가 해럴드 숀버그의 호로비츠 전기에 서술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가 호로비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호로비츠는 내 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란 서로 주고받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볼로쟈는 받기만 하고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본성이었고, 나는 이를 사랑하는 형제의 결점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팽팽한 ‘솔리스트의 실내악’
거장들의 협업이 반드시 뛰어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방향성과 유기적인 앙상블이 없다면 이상적인 실내악 연주라 할 수 없다. ‘삼총사’의 공개적인 트리오 연주는 1932년 카네기홀 공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공황으로 실직한 음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열렸던 이 연주회는 뉴욕의 평론가들로부터 미지근한 평을 들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트리오를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밀스타인과 호로비츠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이들의 트리오 무대는 다시 실현되지 못했다.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이 서방 진출 이후 듀오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불같은 개성을 가진 두 대가는 함께 무대에 오르던 젊은 시절에도 연주의 주도권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밀스타인은 회고록에서 호로비츠와의 연주를 이렇게 회상했다.
“반주할 때 호로비츠는 사람들의 예상대로 지극히 뛰어나게 연주하지만, 가끔 소리가 너무 커질 때가 있었습니다. [...] 나는 반주자 호로비츠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의 그늘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니 말입니다!”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이 함께한 녹음은 단 하나, 1950년 녹음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뿐이다. 호로비츠가 유일하게 남긴 실내악 녹음이기도 하다. 연주를 들어보면 왜 두 사람이 실내악에 열성적이지 않았는지를 대번에 이해할 수 있다. 각자가 불꽃 튀는 비르투오시티를 뿜어내지만, 긴밀한 대화나 양보는 느끼기 어렵다.[▶듣기]
[좌] 나탄 밀스타인 / 사진. ⓒAlban Paris/Ringve Music Museum, 출처. 위키피디아 [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사진. ⓒGeorge Grantham Bain, 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솔로몬 볼코프는 흥미로운 목격담을 전한다. 1984년 회고록 작업을 위해 방문한 호텔에서 우연히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의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연주를 들었는데, 이들의 녹음과는 정반대로 부드러운, 마치 속삭이는 듯한 앙상블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34년 전 두 사람 사이에 흘렀던 날카로운 긴장감은 세월이 흘러 연륜에 자리를 내주었던 것 같다.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은 만년에 듀오 녹음을 구상했다. 밀스타인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7번, 9번과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호로비츠는 그리그와 생상스의 작품을 연주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합의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지만, 두 노대가의 듀오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