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發 10만 달러 비자 폭탄"…캐나다가 웃는 이유 [글로벌 머니 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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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0만 달러 ‘입국 조건’ 부과
2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지난 9월 21일 0시 1분(미국 동부 표준시)을 기점으로 신규 전문직 취업비자(H-1B) 신청자에게 10만 달러의 추가 비용을 부과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 서명한 ‘특정 비이민 노동자 입국 제한’에 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다.
글로벌 인재 채용 시장 급변
미국의 새로운 비자 비용이 실제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보통 TCO(한 명의 인재를 채용하고 회사에서 근무하는 전체 기간 발생하는 모든 관련 비용)가 주로 연봉, 복리후생, 교육비 등으로 구성됐다. 이제는 10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인재 취득세’가 초기 비용에 추가됐다.인재 채용은 단순한 인사 관리에서 재무적 투자 영역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미국 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특정 인재를 해외에서 직접 채용하는 것이 과연 10만 달러 이상의 초기 투자 가치가 있는지를 ROI(투자수익률) 관점에서 냉정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H-1B 비자는 더 이상 범용적인 숙련직 채용 통로가 아닌, 대체 불가능한 최상위 핵심 인재를 위한 ‘프리미엄 채널’로 그 역할이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미국 빅테크와 금융권이었다. H-1B 비자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마이크로소프트, JP모간 등은 대통령 행정명령 서명 직후 긴급 내부 공지를 통해 “H-1B 직원은 미국 내 체류를 유지하고, 해외 체류자는 시행 전 복귀하라”고 권고했다. 이는 정책 집행 과정의 불확실성이 터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기존 직원의 재입국 불가 사태를 막기 위한 선제적 리스크 관리 조치다.
커지는 ‘비자 차익거래’ 시장
H-1B 비자의 비용 장벽이 높아지면서 미국 기업과 글로벌 인재는 다른 합법적인 경로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른바 ‘비자 차익거래’라고 불릴 만한 새로운 시장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가장 주목받는 대안은 O-1(특기자) 비자와 L-1(주재원) 비자다. O-1 비자는 과학, 예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비범한 능력(extraordinary ability)’을 입증한 개인에게 제공한다.O-1 비자는 추첨이나 연간 쿼터 제한이 없다. 비용도 저렴하고 무기한 갱신도 가능하다. 업계에선 미국 기업들이 필요한 인재를 O-1 비자 요건에 맞추기 위해 논문 발표, 학회 강연, 수상 경력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주는 ‘O-1 인큐베이팅’에 투자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L-1 비자는 다국적 기업이 해외 지사에서 1년 이상 근무한 직원을 미국 지사로 파견할 때 사용된다. 신규 채용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기존 직원을 이동시키는 경우에는 H-1B보다 저렴하고 예측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글로벌 인력 배치 전략을 수정해 미국으로 보내려는 핵심 인재를 우선 캐나다나 유럽 지사에서 1년간 근무시킨 후 L-1 비자로 미국에 입국시키는 우회로를 적극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니어쇼어링’ 인재 허브 부상
미국 국경을 맞댄 캐나다와 멕시코에 주목하는 미국 기업도 있다. 이곳이 ‘니어쇼어링’ 방식의 인재 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니어쇼어링은 기업이 생산 거점이나 서비스를 자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로 이전하는 경영 전략이다. 오프쇼어링(멀리 떨어진 해외로 생산을 이전)과 리쇼어링(해외 생산을 다시 본국으로 복귀) 사이 중간 개념이다.
이런 현상은 북미 대륙 전체의 기술 생태계를 재편할 수도 있다. 미국의 인재 정책이 의도치 않게 자국 기업들의 R&D 및 기술 부서 해외 이전을 촉진하는 ‘산업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국민 일자리 보호'라는 정책 목표가 오히려 고임금 기술 일자리를 국경 너머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기술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캐나다는 이 과정에서 북미의 새로운 기술 중심지로 성장하는 반사 이익을 누리게 될 전망이다.
영국은 전 세계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전문직 비자 수수료 면제를 검토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총리실은 ‘글로벌 인재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과학·디지털 등 각 분야 전문가를 영입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중 최상위급 전문가의 비자 수수료를 폐지하는 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세계 상위 5개 대학 출신자나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인재 등에게 비자 수수료를 면제할 방침이다.
영국은 2020년부터 ‘글로벌 인재 비자’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과학·공학·인문학·의학·디지털·예술 분야 전문가가 대상이다. 비자 취득 시 5년간 체류할 수 있으며 연장도 가능하다. 일정 조건 충족 시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자는 취득이 힘들고 비용이 높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글로벌 인재 비자 신청비는 766파운드다. 가족 동반 시 배우자와 자녀도 동일한 수수료를 내야 한다. 여기에 통상 1인당 연간 1035파운드의 건강 부담금까지 부과된다. 영국 정부 관계자는 FT에 현 글로벌 인재 비자 제도를 “관료적 악몽”이라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비자 절차를 더 원활히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혁신 산업 판도 바뀌나
미국의 ‘인재 수입 관세’는 글로벌 거시경제에 복합적인 파급 효과도 나타날 전망이다. 인플레이션 압력 가중, 장기적인 혁신 동력의 재편, 글로벌 자본 흐름의 변화 등이 대표적이다. 단기적으로 10만 달러의 추가 비용은 기업의 운영 비용을 증가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할 수 있다. 해외 인재 채용 비용의 증가는 제품 및 서비스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인력난이 심각하고 H-1B 의존도가 높은 기술 및 전문 서비스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질 수 있다.인재 확보 비용의 증가는 자동화 및 인공지능(AI) 기술 도입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기술 도입에 따른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 역시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장기적인 혁신 동력의 재편될 전망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전 세계의 인재를 흡수하며 기술 혁신을 주도해왔다. H-1B 비자는 연간 총 8만5000개의 쿼터로 운영되며 기술 혁신의 핵심 통로 역할을 해왔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신화는 이민자 출신 창업가들과 엔지니어들의 기여 없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10만 달러라는 높은 비용 장벽은 이런 인재 흐름을 막을 수 있다.
인재가 미국 대신 캐나다, 유럽, 아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발길을 돌린다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기술 경쟁력은 약화할 수 있다. 이는 글로벌 혁신의 중심지가 미국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전 세계 산업 클러스터의 지형을 바꾸는 구조적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정책이 자국 내 혁신 생태계를 위축시키고 경쟁국의 기술 추격을 허용하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기업은 인력 운용 딜레마
최근 미국 투자를 확대한 한국 기업의 부담도 커졌다. 일부 한국 기업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 미국 내 공급망 재편에 발맞춰 수백억 달러 규모를 미국에 투자했다. 이런 투자의 성공은 한국 본사에서 파견된 숙련된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의 역할에 크게 의존하기 쉽다. 이들은 공장 설립 초기 단계의 설비 구축과 공정 안정화, 현지 인력 교육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그러나 10만 달러의 H-1B 입국 수수료 신설은 한국의 인력 파견 모델의 비용 구조를 무너뜨렸다. 예를 들어 100명의 기술자를 미국 공장에 파견해야 하는 기업은 비자 수수료로만 1000만 달러가 추가된다. 단순히 비용 증가 문제를 넘어 투자 프로젝트의 일정 지연, 품질 저하, 투자 효과 반감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동안 한국 기업은 H-1B 비자의 높은 장벽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단기 출장용 비자인 B-1 비자나 비자면제프로그램(ESTA)을 통해 기술 인력을 미국에 보내왔다. 이는 현지 설비 설치, 기술 자문, 긴급 보수 등 단기 업무를 수행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이민 단속은 이런 관행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시 단속에서 구금된 약 300명의 한국인 근로자 대부분이 ESTA나 B-1 비자 소지자로 알려졌다. 한국 기업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공식적인 통로였던 ESTA/B-1 활용은 단속 강화로 법적 리스크가 극도로 커졌다. 공식적인 통로인 H-1B 비자는 10만 달러라는 비용 장벽으로 인해 사실상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E-4 전문직 비자 쿼터’ 확보 등이 거론된다. E-4 비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꾸준히 논의되어온 비자 형식이다. 한국 국적의 전문직 종사자에게만 할당되는 별도의 비자 카테고리를 신설하자는 제안이다. 미국의 E-4 전문직 비자 쿼터는 아직 없다. 관련 법안이 미국 의회에 계류된 상태다. 관련 주요 발의 내용을 보면 연간 최대 1만5000개로 제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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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한명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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