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케나지-프레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블루 컬러 LP / 사진. © 이진섭
아시케나지-프레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블루 컬러 LP / 사진. © 이진섭
반세기 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Vladimir Ashkenazy)의 손끝에서 시작된 시간이 푸른 빛깔의 온화한 감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번에 발매된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피아노)와 앙드레 프레빈(André Previn,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협연)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이하 라피협 2번)> 블루 컬러 LP 얘기다.

이 앨범은 데카 레코드가 클래식 음악사에서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며 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1960~70년대 황금기를 상징하는 음반 중 하나다. 1970년에 세션 녹음이 이뤄졌고 1972년에 발매된 아시케나지-프레빈의 <라피협 2번>은 이번에 리마스터링된 음원을 담은 컬러 LP로 생명력을 얻었다. 턴테이블 위에서 푸른 네온 빛이 감도는 <라피협 2번>은 좀 더 선명한 소리로 청자들의 귀를 사로잡으면서 시각적 매체로서 예술적 가치를 더한 듯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컬러 LP는 블랙 LP에 비해 음질의 밀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LP의 소리 구현을 중요시하는 청자들에게 ‘음악적 매체’라기보다 인테리어같이 ‘장식적 매체’라는 인식이 강했다. 최근에 순도 높은 PVC 사용과 보강된 화합물 처리로 컬러 LP의 생산 방식과 기술이 업그레이드되면서 블랙 LP와 비슷한 수준의 음질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라피협 2번>의 이정표 같은 음반

라흐마니노프가 세상에 남긴 4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라피협 2번>은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고, 음반으로 가장 많이 발매된 작품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데카, RCA 등 주요 클래식 음반사가 발매한 것을 포함해 애플뮤직에 등록된 <라피협 2번>은 약 300여개가 넘는다.

이 앨범은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작곡가의 의도를 잘 살려내는 아시케나지와 전성기 시절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우뚝 선 프레빈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일궈낸 역작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연주자들에게 <라피협 2번>의 교과서 같은 앨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 사진. © 유니버설뮤직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 사진. © 유니버설뮤직
1악장 Moderato

초반부 심연을 치고 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점점 커진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진 인간을 깨우는 종소리처럼 <라피협 2번>의 실체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드러난다. 우수에 찬 쓸쓸한 방랑자의 고뇌가 휘몰아치듯 1주제가 끝나면, 피아노가 그 내면을 다시 탐구한다. 아시케나지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에너지로 연주를 이끌고 간다. 무덤덤하고 절제가 깃든 그의 프레이징을 관현악이 사방으로 흔들어 놓았다가,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종반부에 이르러 부드러운 현악으로 1악장의 긴 잔향을 일으킬 때, 아시케나지의 손길은 한 알의 물방울처럼 청명한 빛깔을 연주한다.

2악장 Adagio sostenuto

피아노와 플루트와 대화로 시작된 2악장은 윤슬처럼 다가온다. 1악장의 테마가 절망과 슬픔이라면, 시시각각 감정이 동요하는 2악장은 위로와 치유다. 아시케나지는 담백하게 그려낸 바닷가의 풍경처럼 서정의 폭을 서서히 넓혀가며 연주를 이끌어간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벌어진 틈으로 몇 차례 우울하고 절망적인 감정으로 회귀하려 할 때, 정교하고 정갈한 피아노 선율은 빛의 안내자가 되어 2악장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3악장 Allegro scherzando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익살스러운 테마는 3악장 초반에 등장해 그동안 긴장된 감정을 어루만져준다. 서주부터 고조된 오케스트라에 화려한 피아노 연주가 등장하고, 투티의 빠르기가 피아노와 함께 변한다. 클라이맥스에서 질주하는 아시케나지는 휘몰아치는 스포츠카보다 훨훨 타는 불꽃은 정열의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금관의 울림은 날카롭게, 현악은 더 선명하게 솟아오르며, 환희의 코다로 화려하게 전곡이 마무리된다.

블루는 차갑다. 그러나 이 LP에 담긴 <라피협 2번>은 차갑지 않다. 바늘이 닿는 순간, 표면의 청명한 색이 서서히 음의 온도를 올리고, 오래된 숨결을 현재 시점으로 되돌려 놓는 이 앨범은 피아노의 미적 가치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