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과 대립이 만들어낸 동화 속 세상

19세기가 저물고 20세기가 밝아올 무렵, 스페인은 기대와 설렘보다는 좌절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895년 초부터 쿠바에서 스페인의 오랜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규모가 커지며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쿠바는 정치적으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1898년에는 기회를 엿보던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스페인과 미국의 대결로 비화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던 스페인은 세계 무대에 새로운 사자로 등장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침내 스페인은 미국이 내민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전쟁을 끝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착륙한 이래 400년 가까이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온 쿠바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제국 스페인의 몰락이었다. 쇠락한 스페인은 쿠바뿐만 아니라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 남아 있던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했다. 스페인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쿠바는 남미와 유럽을 잇는 해상 무역의 요충지였다. 스페인의 부자들에게 식민지 상실은 자신들이 소유한 부의 상실로 여겨졌다. 해외 시장을 잃어버린 자본가들은 차츰 국내 투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사업 구상을 위해 영국을 여행하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공원 속에 자리한 고급 주택단지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주택단지를 건설하고 싶었다.

귀국한 구엘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라 살루트 지구에 있는 문타냐 페라다(Muntanya Pelada) 일대를 매입했다. 5만 평이 넘는 방대한 땅이었다. ‘벌거벗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지역은 바르셀로나 북쪽에 솟아 있는 작은 야산으로,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포도밭이 많았으나 갑자기 역병이 돌면서 피폐해져 황무지로 남아 있던 땅이었다. 말 그대로 벌거숭이 산이었기에 바위와 돌이 많았고, 비탈이 가팔랐으며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구엘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우디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러난 악조건을 순화시키고 감춰진 호조건을 발견해 내는 것은 신이 가우디에게 부여한 남다른 능력이었다. 지중해를 발아래 굽어볼 수 있는 공기 좋은 산허리에 카사 비센스나 벨예스구아르드 내지는 자신의 저택 같은 근사한 집을 지을 만한 택지를 조성한다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부자들이 앞다투어 몰려들 것으로 기대했다. 구엘의 바람대로 가우디는 벌거벗은 황량한 산에 사색과 묵상 그리고 자유와 평화라는 근사한 옷을 입혔다. 산의 본래 모습이 손상되지 않도록 등선을 따라 도로를 만들었다. 이미 자라고 있던 나무를 피해 곡선으로 길을 내고 곳곳에 야자수와 선인장 등 물이 적어도 살 수 있는 지중해성 식물을 새로 심었다. 비탈을 평평하게 하는 데는 벨예스구아르드에서 선보인 버섯 모양의 축대 건설 방식이 응용되었다. 자연을 따라 자연과 합일되게 건축했기에 바위와 돌과 흙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었다.
후문 앞 종려나무 위에서 발견한 둥지. 푸른 깃털을 가진 퀘이커 앵무새가 새끼에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먹였다. 구엘 공원의 본래 조성 목적을 잘 웅변해 주는 장면 같았다. / 사진. ⓒ 김혜경
후문 앞 종려나무 위에서 발견한 둥지. 푸른 깃털을 가진 퀘이커 앵무새가 새끼에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먹였다. 구엘 공원의 본래 조성 목적을 잘 웅변해 주는 장면 같았다. / 사진. ⓒ 김혜경
단지 구석구석을 상세히 살펴본 가우디는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살려 집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60개 정도로 구획했다. 한 택지당 규모는 300평가량이었다. 구엘은 단지의 부대시설과 공용구간을 먼저 건설한 뒤 가우디가 구획한 대로 택지를 분양했다. 60채의 집을 가우디가 다 건축하고 나서 살 사람을 모집해 파는 방식이 아니었다. 택지를 분양받은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건축가에게 의뢰해 자신이 원하는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가우디는 집합 주거지에 필요한 도로, 광장, 계단, 담장, 시장, 마구간, 벤치 등을 만들며 단지 전체의 모습을 연출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가 직접 건축한 건물은 정문 앞에 있는 과자의 집, 즉 경비실과 관리실 두 채뿐이다. 1900년에 시작된 공사는 1914년까지 이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평화의 공간, 대제국 몰락의 결과로 탄생한 신흥재벌 거주지, 자연 재료와 인공 재료를 대립이 아닌 조화와 일치로 녹여낸 현장, 구엘 공원은 수많은 모순과 충돌을 극복하고 완성한 구엘과 가우디 두 사람의 오랜 갈망을 담아낸 값진 유산이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정성 들여 조성된 구엘의 전원도시는 인기가 있었을까?

단 두 채의 집만 건축된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을 가장 저렴하고 편안하게 가는 방법은 카탈루냐 광장에서 그라시아 거리 방향으로 운행하는 24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여행자 대부분이 구엘 공원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생각보다 공원이 꽤 넓다. 가파른 언덕과 계단도 자주 오르내려야 한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다 보려고 서두르다 보면 일찍 지칠 수 있다. 나들이 온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또는 경건한 순례자의 심정으로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넉넉한 태도와 풍성한 감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접이식 의자나 돗자리를 준비하고 물과 도시락을 챙겨오는 것도 괜찮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은 후문이다. 정문 앞은 좁은 골목길이라 버스가 다니기 어렵고 주차할 곳도 없다. 그래서 대다수가 후문으로 들어왔다가 정문으로 나간다. 정문으로 입장하면 올라가면서 둘러봐야 하지만, 후문으로 들어가면 내려가면서 감상할 수 있어 한결 편하다. 예약 확인 절차를 거쳐 후문으로 들어서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위쪽으로 가면 돌 구름다리로 이어진 산책로가 나오고 아래쪽으로 가면 가우디가 살던 집을 거쳐 자연 광장으로 이어진다.
마차가 다니던 길 양쪽으로 커다란 돌 화분이 놓여 있다. 안에 있는 식물은 용설란이다. 잎이 용의 혀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설란의 꽃말은 ‘강한 의지와 용기’다. / 사진. ⓒ 김혜경
마차가 다니던 길 양쪽으로 커다란 돌 화분이 놓여 있다. 안에 있는 식물은 용설란이다. 잎이 용의 혀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설란의 꽃말은 ‘강한 의지와 용기’다. / 사진. ⓒ 김혜경
길 양쪽에는 둥그런 돌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작다. 걸터앉아 쉬는 사람도 보인다.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묵주 형상이다. 가우디는 후문 입구부터 골고타 언덕에 이르는 길가에 150개의 돌 묵주를 배치해 놓았다. 이 숫자는 우연이 아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묵주 전체는 구약성서의 150개 시편과 연결된 150개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가우디는 구엘 공원에 거주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갈 때마다 예수와 마리아를 묵상하며 기도하는 영적 자세를 가질 것을 염원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길을 ‘묵주의 길(Camino del Rosario)’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돌 묵주 바깥으로 사람들이 다니고 안쪽으로 마차가 다니도록 설계되었으나 지금은 구분 없이 사람들이 거니는 길이 되었다.
길 양쪽에 놓인 둥그런 돌들. 크고 작은 묵주로 전부 150개다. 그래서 이 길을 ‘묵주의 길(Camino del Rosario)’이라 부른다. 몬세라트에서 봤던 ‘묵주의 신비 길’을 연상시킨다. / 사진. ⓒ 김혜경
길 양쪽에 놓인 둥그런 돌들. 크고 작은 묵주로 전부 150개다. 그래서 이 길을 ‘묵주의 길(Camino del Rosario)’이라 부른다. 몬세라트에서 봤던 ‘묵주의 신비 길’을 연상시킨다. / 사진. ⓒ 김혜경
길을 걷다 보면 왼쪽에 분홍 장밋빛 집 하나가 드러난다. 첨탑 끝에는 철제 십자가가 달려 있다. 가우디가 살던 집이다. 1906년부터 1925년까지 살았지만, 그가 건축한 집은 아니다. 가우디는 조수이자 유력한 협력자였던 프란세스크 베렝게르에게 전시용 주택을 짓도록 했다. 나중에 그 집에 자신이 아버지와 조카딸을 데리고 들어와 산 것이다. 지금은 가우디 하우스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가우디가 만든 가구와 침실, 기도처 등이 전시되어 있다. 후문 위쪽 꼭대기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다. 구엘 가문의 변호사인 마르티 트리아스가 소유했던 집이라 카사 트리아스(Casa Trias)로 불린다. 1903년에서 1906년 사이에 지어진 이 집은 오늘날에도 개인 주택으로 남아 있다. 정문 왼쪽 위편에는 붉은 기와 지붕 집이 보인다. 구엘이 살던 집으로 카사 라라드(Casa Larrard)라고 불렀다. 원래 이곳에 있던 저택인데 구엘이 매입해 자신의 집으로 꾸며 살았다. 구엘 공원에는 이 세 사람 집만 있었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건축주 구엘, 꿈을 현실로 만든 건축가 가우디, 구엘과 가우디를 지지했던 유일한 입주자 트리아스. 분양은 완전히 실패했고 집은 단 두 채만 건축되고 말았다.
구엘 공원에는 세 사람의 집만 있었다. 정문 왼쪽 위편 붉은 기와 지붕 집이 구엘, 오른쪽 언덕의 십자가 첨탑 집이 가우디, 맨 꼭대기 흰색 집이 변호사 트리아스의 집이었다. / 사진. ⓒ 김혜경
구엘 공원에는 세 사람의 집만 있었다. 정문 왼쪽 위편 붉은 기와 지붕 집이 구엘, 오른쪽 언덕의 십자가 첨탑 집이 가우디, 맨 꼭대기 흰색 집이 변호사 트리아스의 집이었다. / 사진. ⓒ 김혜경
달리가 즐겨 앉았던 광장의 물결 벤치

구엘과 가우디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구엘 공원 프로젝트는 왜 실패하고 말았을까?

첫째, 접근성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고딕 지구 등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인 에이샴플레에서 구엘 공원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부자들은 그라시아 거리에는 집을 짓고 싶었으나 벌거숭이 산에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마차를 타고 다니기에는 너무 고지대였다.

둘째, 치안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문타냐 페라다 일대는 노동자와 부랑자들이 모여 살았다. 당연히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다. 부자들이 이들과 한데 섞여 불안을 등에 지고 살고 싶어 할 리 만무했다. 구엘의 영향력과 가우디의 천재성도 치안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셋째, 생활의 편리성이 떨어졌다. 물이 부족한 곳이라 상하수도 문제가 걱정스러웠고, 도심에서 떨어져 있기에 장을 보기도 불편했다. 광장을 만들어 비가 올 때 물을 저수통에 모아 사용하고, 광장 아래를 시장으로 만들려 했으나 부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광장 아래는 고대 그리스 신전 같은 곳이다. 도리스식 기둥 86개가 떠받치고 있는 천장에는 구름과 태양 모양의 원형 타일이 장식되어 있다. 본래 시장으로 사용하려던 장소다. / 사진. ⓒ 김혜경
광장 아래는 고대 그리스 신전 같은 곳이다. 도리스식 기둥 86개가 떠받치고 있는 천장에는 구름과 태양 모양의 원형 타일이 장식되어 있다. 본래 시장으로 사용하려던 장소다. / 사진. ⓒ 김혜경
바람이 불었다. 종려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스피커에서 라틴 음악이 들렸다. 광활한 구엘 공원을 산책하던 세 남자를 생각했다. 구엘과 가우디와 트리아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구엘은 자신의 실패를 자책했을까? 가우디는 구엘 공원의 예술성과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자들을 원망했을까? 트리아스는 구엘과 가우디를 위로하며 다독였을까?

고가도로와 다양한 꽃과 식물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왼쪽 아래 시야가 탁 트인 드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가우디는 택지 분양이 끝나 주민들이 입주해 살게 되면 마을 공동체 전체가 모일 수 있는 광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담소를 나누거나 공연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인위적인 공사는 최소한에 그치려 했으나 광장만큼은 천연 광장으로 사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는 주변보다 골이 깊은 곳에 자연 광장, 즉 나투라 광장(Plaça de la Natura)을 만들었다. 광장에 서면 바르셀로나 시내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물론 멀리 지중해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가우디는 파르나소스산에 자리한 고대 그리스 도시 델포이의 광장을 참고했다. 이는 그리스 역사와 문화를 좋아한 구엘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듯이 가우디는 구엘 공원이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중심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정문부터 광장에 이르는 곳곳에 그리스 신화를 입혔다.
공원의 중심인 광장. 가장자리는 형형색색의 타일로 장식한 벤치가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가우디의 트렌카디스 기법이 절정에 달한 듯 신비와 황홀이 햇살처럼 반짝인다. / 사진. ⓒ 김혜경
공원의 중심인 광장. 가장자리는 형형색색의 타일로 장식한 벤치가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가우디의 트렌카디스 기법이 절정에 달한 듯 신비와 황홀이 햇살처럼 반짝인다. / 사진. ⓒ 김혜경
광장의 가장자리에는 깨진 타일 조각을 붙여 만든 구불구불한 벤치가 놓여 있다. 뱀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가우디는 깨진 타일 조각을 모으기도 했지만, 일부러 멀쩡한 타일 작품을 깨뜨려 사용하기도 했다.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관념이든 기술이든 재료든 창조를 위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건 과감한 파괴였다. 가우디의 트렌카디스 기법은 구엘 공원에서 만개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오랜 협력자인 호세 마리아 후홀이었다. ‘건축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색채를 다스리는 마법사였다. 벤치를 장식한 타일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가우디는 무수한 상징을 그 안에 숨겨 놓았다. 성경 구절과 기도문도 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보고 읽을 수 있도록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을 거꾸로 새겨 넣기도 했다.
깨진 타일 조각을 아무렇게나 붙인 것 같지만, 속에는 수많은 그림과 글자들이 숨어 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볼 수 있도록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을 거꾸로 새겨 넣기도 했다. / 사진. ⓒ 김혜경
깨진 타일 조각을 아무렇게나 붙인 것 같지만, 속에는 수많은 그림과 글자들이 숨어 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볼 수 있도록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을 거꾸로 새겨 넣기도 했다. / 사진. ⓒ 김혜경
카탈루냐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가우디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구엘 공원을 즐겨 찾은 그가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특유의 콧수염을 드러내고 다리를 꼰 채 광장 벤치에 앉아 가우디가 건축한 관리실 꼭대기 십자가가 머리 위에 얹힌 것처럼 보이게 촬영한 사진이다. 그 자리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벤치가 장식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었기에 앉으면 더없이 편안하다. 가우디는 광장을 활용해 부족한 물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비가 오면 벤치 아래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뒤편 고랑으로 모인 빗물은 사자처럼 생긴 동물의 입으로 흘러내린다. 벤치를 청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장에 내린 비는 모래, 자갈, 점토로 이루어진 바닥층을 거치며 깨끗하게 정화되어 아래쪽에 있는 신전 기둥을 타고 저수통으로 모인다. 이 물은 나무와 화초의 관수로 사용되었고, 가뭄 등으로 물이 부족할 경우 사람들의 식수로도 이용했다. 물이 너무 오래 저장되어 있으면 오염될 우려가 있었기에 광장 계단 아래 용과 뱀의 입 등을 통해 분수처럼 흐르도록 조치했다.
비가 오면 벤치 아래 구멍을 통해 뒤편 고랑으로 모인 빗물은 사자처럼 생긴 동물의 입으로 흘러내리고, 광장에 내린 비는 정화되어 아래 신전의 기둥을 타고 저수통으로 모인다. / 사진. ⓒ 김혜경
비가 오면 벤치 아래 구멍을 통해 뒤편 고랑으로 모인 빗물은 사자처럼 생긴 동물의 입으로 흘러내리고, 광장에 내린 비는 정화되어 아래 신전의 기둥을 타고 저수통으로 모인다. / 사진. ⓒ 김혜경
유승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