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기로디의 영화는 19금의 측면에서 무시무시하다. 여성 성기를 클로즈업으로 담은 <스테잉 버티컬>(2016)은 국내에 수입조차 되지 못했다. 남성 간의 노골적인 구강성교를 담은 <호수의 이방인>(2013)은 수입은 되었지만, 정식 개봉 대신 영화제 등을 통해 알음알음 소개되며 실체 있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렸을 뿐이다. 알랭 기로디의 신작 <미세리코르디아>의 소식이 반가운 건 19금 장면의 수위가 낮다는 것. 발기한 성기 노출 정도…. 국내 개봉(7월 16일)의 걸림돌이 사라졌다.

제레미(펠릭시 키실)는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는다. 빵집 보조로 일하면서 인연을 맺은 사장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은 제레미와의 재회가 반갑지만, 마르틴의 아들 뱅상(세르쥬 리샤르)은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눈치다. 며칠 더 묵고 가라는 마르틴의 제안을 제레미가 받아들이자, 뱅상은 이에 반발하고 둘은 치고받고 싸우는 지경에 이른다. 다행히 마을 신부(쟈크 드블레)의 중재로 둘은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것도 잠시, 제레미와 뱅상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사라진 뱅상을 두고 제레미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주변의 반응은 일반의 예상을 비껴간다. 제레미를 사건의 가해자로 의심하는 게 보통일 텐데 마르틴은 아들 뱅상과 제레미가 단둘이 무얼 했는지가 더 궁금하다. 안 그래도 마르틴은 고인이 된 남편과 제레미가 서로 몸을 섞은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제레미는 옛친구를 찾아 관계를 요구하다 그의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마을 커뮤니티에서 추방당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경찰 외에 제레미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알랭 기로디의 세계에서 사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물 간의 관계를 노출하는 일종의 스모킹건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정의 실현과 같은 사건 해결에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다. 익명의 군중이 한 개체로 움직이는 도시와 다르게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아 은밀한 속성을 지닌 자연을 배경으로 삼는 알랭 기로디는 그 안에서 끓는 점을 초과한 인간의 욕망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윤리성과 상관없이 그 욕망이 자연 그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커뮤니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초점을 둔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몰개성을 개성으로 하는 도시에서 다르다는 건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인 것에 반해 알랭 기로디의 자연에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감출 필요가 없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누구를 불편하게 하지도 않고 훌러덩 맨몸으로 노골적인 체위의 관계를 맺어도 방해하거나 훔쳐보는 이도 없다. 제레미와 뱅상은 서로를 향한 분노를 주먹질로 해결하려는데 그러다가 살인이 벌어진다. 그래서 알랭 기로디 영화의 자연은 욕망의 무한지대이면서 그 자유에 어떠한 제약도 없어 종종 선을 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위 정상성의 범주에서 통용되는 룰이 적용하지 않다 보니 <미세리코르디아>의 사건의 여파는 예측이 불가한 시계 제로의 양상이다. 제레미와 뱅상 사이의 갈등을 눈치챈 신부는 뱅상의 사망이 제레미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제레미의 범행을 의심하는 경찰에게 목격한 사실만 증언해도 안갯속의 사건은 만천하에 드러날 일이지만, 신부는 그렇다고 뱅상이 살아 돌아오거나 제레미가 범행을 참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체를 묻고 그 위로 피어난 버섯을 먹고 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서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암호문 같은 이 영화의 제목 ‘미세리코르디아 Misericorde’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의 기독교적인 자비 혹은 관용을 뜻하는 라틴어다. 제목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제레미를 향한 신부의 대응과 마르틴의 반응 역시 받아들이기란 어렵지 않다. 타인은 나 아닌 모든 다른 이를 지칭하지만, 이분법의 논리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우리와 다른 이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해 우리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별개의 존재로 무시당해 왔다.

신부에게 타인은 나를 제외한 이들의 총합이라서 성별과 종교 유무와 죄의 있고 없음과 과거의 전력 등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이다. 신부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죄진 자에 형벌을 가했다고 범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선한 자라고 해도 반드시 악한 짓을 행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는 까닭에 회개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려 한다면 하느님의 용서를 구해 지금보다 더 나은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기존의 상식과 도덕의 근간을 흔드는 알랭 기로디의 도발은 문제적이다. 틀에 박힌 생각을 흔들어 좀 더 진보한 사고(思考)를 하도록 논쟁거리를 던져준다. 결말에서 신부의 도움으로 체포될 위기를 벗어난 제레미는 마르틴의 침실을 찾아 함께 자도 되겠냐며 묻는다. 마르틴은 조건 없이 허락하며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아주는데 아들 살해의 가해자, 남편과 잠자리를 가졌던 남자에 관한 원한이나 분노 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자비의 감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알랭 기로디의 영화를 대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 성적으로 불편한 설정이나 장면이 등장한다고 그의 영화를 관람할 기회를 잃는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마르틴처럼 손을 내밀어 알랭 기로디의 영화를 본다는 건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달리 보겠다는 의지이다. 편하게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건 순응하겠다는 마음과 다르지 않아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른 목소리를 낼 때 세상은 비로소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우리에겐 그런 방식의 ‘미세리코르디아’가 필요하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