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침볼도와 레귬, 자연을 언어로 표현하다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곡물을 물감 삼아 그림을 그리던 화가가 있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는 사과, 콩, 옥수수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보리와 버섯 등으로 계절을 표현했다. 당대에는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기묘하게 여겨졌지만, 그는 자연을 감각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무한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을 그리되, 자연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 초상화였다.

특히 ‘사계절(Four Seasons)’ 연작은 시즌별 각기 다른 재료로 계절의 얼굴을 그려내며, 그 안에 흐르는 자연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해 조형적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오늘날, 접시 위에서 그와 닮은 상상력이 다른 방식으로 피어난다. 붓 대신 식재료를 다루는 손끝에서, 자연은 다시 한 번 예술이 된다.
겨울, 봄, 가을, 여름(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계절’, 캔버스에 유채, 각 76×63.5cm, 1573. 루브르박물관 소장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겨울, 봄, 가을, 여름(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계절’, 캔버스에 유채, 각 76×63.5cm, 1573. 루브르박물관 소장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국내 최초, 비건 미쉐린 1스타의 탄생

100% 식물성 재료만으로 계절의 흐름을 담아내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레귬(Légume)’은 예술적 상상을 실현하는 공간이다. 2025 미쉐린 가이드 서울&부산에서 별 하나를 획득하며, 국내 최초의 비건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 수상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비건이라는 새로운 미식의 언어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남는다.

계절을 빚은 채소 요리, 코스의 첫 문을 열다

프랑스어로 ‘채소’를 뜻하는 이름처럼 '레귬'은 비건이라는 언어로서 계절의 숨결을 코스마다 섬세하게 녹여낸다.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첫번째 디쉬는 완두콩과 키위이다. 동충하초 뿌리와 키위를 잘게 다져 섞은 샐러드와 완두콩 폼 소스가 산뜻하게 입맛을 돋궈주고, 그 위에 얹은 동충하초 스템이 쫀득한 식감과 고소한 향을 더했다. 이어 등장한 작은 쿠키는 레귬의 제로 웨이스트 철학을 상징한다. 손질하고 남은 자투리 채소와 호밀로 만든 크래커 사이에 캐러멜라이즈한 양파와 양배추 파테를 샌드한 이 한입은, 단순한 스낵을 넘어선 하나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한입 크기의 베지 꼬치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지녔다. 속을 파낸 금귤에 찰옥수수를 채우고, 봉긋하게 올라온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스프레드 위에 당근, 처빌로 정갈하게 마감했다. 금귤의 산미와 단맛, 짭짤함이 층을 이루며, 맛의 대비가 입 안에서 경쾌하게 느껴져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좌측부터] 완두콩과 키위, 채소 쿠키, 베지 꼬치 / 사진. © 김현정
[좌측부터] 완두콩과 키위, 채소 쿠키, 베지 꼬치 / 사진. © 김현정
은은한 캐모마일 향과 레몬즙을 입힌 어린 배 사이에, 아몬드를 곱게 갈아 만든 리코타풍 비건 치즈와 두유를 천천히 끓여 얻은 막인 ‘누바’를 섞은 속재료가 들어간다. 고소함과 산뜻함, 아삭함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이 디쉬는 취향에 따라 톡톡 터지는 식감이 매력적인 ‘톤부리’를 비건 캐비어처럼 추가해 즐길 수 있다.

이어서 서리태 퓨레 위에 잠두콩, 오이, 딸기를 올린 디쉬는 발효된 콩 특유의 개성 있는 풍미에 허브 오일을 더해, 살짝은 낯설지만 흥미로운 조화를 완성한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대담한 도전이 레귬의 요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맛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냉이 토마토 수프는 냉이 뿌리로 낸 맑은 채수에 대저 토마토와 양파, 냉이 잎을 넣고 끓인 뒤 파슬리 오일로 마무리했다. 언뜻 보면 담백해 보이지만, 한입 머금으면 토마토의 강렬한 풍미가 여운처럼 남는다. 따뜻하고도 정갈한 한 그릇이 새롭게 다가오는 계절의 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좌측부터] 시그니처 디쉬인 배, 새롭게 선보이는 딸기 요리 / 사진. © 김현정
[좌측부터] 시그니처 디쉬인 배, 새롭게 선보이는 딸기 요리 / 사진. © 김현정
식재료의 대화, 조화와 대담함 사이

코스는 중반을 지나며 깊이를 더해간다. 감자 대신 병아리콩을 곱게 갈아 만든 뇨끼는 쫀득한 밀도를 지녀, 입 안에서 독특한 식감을 남긴다. 은은한 단맛의 구운 당근 퓌레와 상큼한 파프리카 피클, 길게 썬 죽순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맛의 균형을 이룬다. 맨 위를 덮은 이스트 향을 입힌 빵가루는 식감의 변주를 더해 씹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각각의 재료가 가진 감칠맛이 미묘하게 겹치며 디쉬 전체를 풍성하게 완성한다.

효모 풍미의 구운 캐슈넛 퓨레를 얹은 콜리플라워에는 케이퍼 소금이 감칠맛을, 바닥에는 쫀득한 식감이 매력적인 호라산 밀이 고소하면서도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식감에 새로운 질감을 더한다. 이윽고 메인 요리로 등장한 아위 버섯은 표고 리덕션을 덧바르며 구워내 자연의 흙내음을 극대화했다. 숯 오일이 농도를 더하고, 가니쉬로 나온 아삭한 사보이 양배추, 돼지감자 퓨레가 감각의 균형을 완성한다. 즙이 풍부한 아위버섯은 그 자체로 ‘육식적 식감’을 대체하며, 고기 없이도 완성도 높은 메인 플레이트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좌측부터] 병아리콩 뇨끼, 가볍게 튀긴 컬리플라워, 메인인 아위버섯 / 사진. © 김현정
[좌측부터] 병아리콩 뇨끼, 가볍게 튀긴 컬리플라워, 메인인 아위버섯 / 사진. © 김현정
디저트부터 작두콩차까지, 이어지는 여운

디저트의 흐름도 아름답다. 리치 폼이 올라간 자스민 유자 소르베로 가볍게 시작을 알리고, 마카다미아 넛으로 만든 비건 아이스크림은 유제품 없이 직접 간 견과류로 만들어져 진하고 고소하다. 루이보스 티를 우려서 만든 시럽과 그래놀라 칩이 맛의 층을 더하며 입 안 가득 다채로운 질감을 이룬다. 마지막은 제주산 한라봉 젤리로, 생강의 스파이시한 향이 은은한 여운을 남기며, 따뜻한 작두콩 차가 조용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좌] 유자 소르베  [우] 바닐라 마카다미아넛 아이스크림 / 사진. © 김현정
[좌] 유자 소르베 [우] 바닐라 마카다미아넛 아이스크림 / 사진. © 김현정
한라봉 젤리와 작두콩 차 / 사진. © 김현정
한라봉 젤리와 작두콩 차 / 사진. © 김현정
한 접시 위의 철학, 지속 가능한 식탁을 위한 선택

레귬의 성시우 셰프는 ‘스와니예’를 거쳐 독립한 후, 국내에서 아직 낯선 비건 파인다이닝의 길을 정성껏 닦아왔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우리 농산물을 조명하고 채식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변화시키기 위한 여정”이라 표현한다. 최근에는 자신의 철학과 노하우를 담은 레시피북 <더 비건 팬트리를 출간했다. 전문 요리사가 아니더라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된 이 책은, 비건을 일상의 한 방식으로 제안하는 또 하나의 접시이자 또 다른 대화이다.

또한 레귬은 요리뿐 아니라 공간에서도 철학을 전한다. 폐도자기로 만든 접시와 디저트 보울, 국내 작가들과 협업한 업사이클링 식기는 아름다움을 넘어 ‘지속 가능한 미식’이라는 메시지를 품는다. 한 끼 식사를 통해 환경과 예술 그리고 일상이 잔잔히 연결된다.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달라도, 그 아름다움을 정제해 전한다는 점에서 아르침볼도의 그림과 레귬의 요리는 닮아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계절을 표현하는 손끝. 그 둘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만날 때, 식탁은 가장 조용하고도 섬세한 캔버스가 된다. 레귬은 그 위에 미(美)와 미(味), 두 세계의 조화를 정성스럽게 그려낸다.

김현정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