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신발 민망해서 못 신겠다"…40대 직장인의 탄식 ['영포티' 세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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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로고' 들어오는 '영포티 밈'
실제 4050 선호는 '로고리스'
일부 '젊은 과시'가 조롱 타깃
"길에서 또래 남성이 나이키 옷을 입고 있으면 '저 사람 영포티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예전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요즘은 저도 모르게 그런 프레임을 씌우게 된다"
서울 중구에 있는 한 대기업 40대 직장인 박모 씨는 최근 패션 브랜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온라인상에서 '조롱'이 내포된 영포티 밈(meme·유행 소재)이 빠르게 퍼지면서 특정 브랜드 옷을 착용한 영포티 세대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으로 굳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씨는 "심지어 내가 그런 옷을 입을 때도 괜히 민망할 때가 있다"며 "러닝 양말에 나이키 에어맥스를 신거나 캡 모자 같은 아이템을 편하게 쓰고 싶은데 '또 누가 보면 영포티라고 하겠지' 싶은 생각에 망설여진다"고 토로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영포티 담론이 확산한 이후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영역 중 하나가 패션이다. 특정 브랜드와 스타일이 4050세대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지면서 이른바 '영포티룩'을 거부하는 4050세대도 늘어나고 있다.
◇ 빠르게 번진 영포티 패션 밈
'스투시', '슈프림', '뉴에라', '스톤아일랜드', '크롬하츠'… 흔히 '영포티 패션'으로 꼽히는 브랜드들이다. 이 옷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로고, 비싼 가격대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유행했던 스타일이라는 점이다.이들이 최근 젊은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브랜드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래서 넥스트포티는 "왜 우리가 입는 브랜드를 아저씨들이 젊은 척하면서 입냐"라며 불만을 터뜨리고, 영포티는 "젊은 세대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입어온 브랜드일 뿐"이라며 맞선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힙합 가수 '염따'가 영포티 밈을 패러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한 라이브 방송에서 "어른이면 영포티라고 불린다고 싸우지 말고 보듬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문제는 이런 밈이 단순한 조롱을 넘어 '세대 갈등'을 심화시키는 수준으로 상황이 악화했다는 점이다. 관련 콘텐츠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쉴 새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실제 구글코리아가 발표한 '2025년 올해의 검색어'에 따르면 전년보다 검색량이 급증한 패션 키워드 1위는 '영포티 룩'이다. 최근 몇 달간 영포티 패션을 둘러싼 논쟁과 밈이 끊임없이 이어진 영향이다.
◇ 영포티의 진짜 선택은 '로고리스'
영포티의 상징처럼 그려지는 이른바 '빅로고 패션'은 실제 4050세대가 즐겨 입는 브랜드와는 차이가 있다. 카카오스타일이 운영하는 4050 패션 플랫폼 포스티에 따르면 2025년(1~11월) 누적 거래액 기준 남성 카테고리 상위 5개 브랜드는 '파리게이츠', '네파', '폰드', '볼빅', '인디안'이다.대부분 골프웨어나 아웃도어 기반의 스포츠웨어 브랜드로, 로고가 크지 않은 단정한 디자인에 편안함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성 소비자들도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같은 기간 여성 카테고리에서는 '쉬즈미스', 'PAT', '모조에스핀', '올리비아로렌', '리스트' 같이 단정한 실루엣을 앞세운 브랜드들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중저가 브랜드뿐 아니라 하이엔드 시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최근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로로피아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등 로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로고리스(Logo-less)' 브랜드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은 화려한 로고보다 소재나 실루엣 등 품질에 주력해 소비자 선택을 끌어내고 있다.
이는 실적에서도 확인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로로피아나코리아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6%, 24% 증가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글로벌시장에서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12.4% 증가하고 영업이익은 16% 증가했다.
이는 로고 노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구찌' 같은 브랜드가 상대적으로 고전하고 있는 흐름과 대조적이다. 구찌코리아는 국내 시장 실적을 별도로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브랜드 글로벌 매출이 감소세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 내 실적도 부진할 것이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실제 지난해 백화점 매출은 25%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 문제는 패션 아닌 '태도'
영포티 세대의 패션을 조롱하는 밈은 왜 생겼을까. 전문가들은 젊음을 과시하는 일부 4050세대의 태도가 논란을 키운 요인이라고 지적한다.호영성 대학내일20대연구소 소장은 "요즘 40대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젊은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건 사실이지만 '나 이렇게 젊게 살아', '나도 이 정도는 알아'라는 식으로 과시하거나 젊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2030세대가 많다"며 "젊게 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과시하며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려 할 때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대 직장인 지모 씨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원래는 영포티 논란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냥 각자 좋아하는 브랜드를 입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최근 다니던 헬스장에서 안 친한데도 항상 친한 척하며 말을 걸던 사장이 스투시 후드티를 입고 있는 걸 봤을 때 거부감이 확 느껴졌다. 온라인에서 보던 밈이 실제 상황과 겹쳐 보였다"고 설명했다.
세대 간 패션 소비 양상이 다르다는 점도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영포티 세대는 실용성, 기능 등을 기준으로 의류를 고르지만 넥스트포티는 브랜드 철학이나 정체성을 강조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최근 2030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마뗑킴', '세터', '제너럴아이디어', '시티브리즈' 등도 모두 기성 브랜드들과 차별화된 감성을 강점으로 내건 디자이너 브랜드들이다.
세대별 소비자 특성을 분석한 도서 '세대욕망'의 저자 강승혜 대홍기획 데이터인사이트팀 팀장은 "4050세대는 옷을 선택할 때 나이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취향이나 필요한 기능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며 "하지만 2030세대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우영미'나 '아크네' 같은 브랜드를 보면서 '젊은 층의 스타일을 상징하는 브랜드'라고 인식하는 것이 그 예"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 같은 기준에서 보면 4050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를 착용했을 때 '저런 아저씨도 이걸 입네?'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 넥스트포티의 '뉴트로', 영포티 세대는 '추억템'
영포티와 2030세대가 패션 소비를 두고 충돌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결 고리도 있다. 뉴트로(복고)라는 키워드가 대표적이다.넥스트포티가 열광하는 뉴에라·슈프림을 비롯해 '아디다스 삼바', '나이키 에어맥스', '푸마 스피드캣' 같은 아이템들은 모두 영포티가 청춘을 보냈던 시기에 유행한 제품들이다. 최근 몇 년간 젊은 소비자층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Y2K(복고) 트렌드도 마찬가지다.
뉴트로를 찾는 이유는 세대별로 다르다. 영포티 세대가 과거에 유행한 '빅로고 브랜드'에 다시 눈을 돌리는 건 이들이 어린 시절 동경했던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영포티가 10~20대를 보낸 1990년대는 현재 대중문화의 원형이 형성되던 시기다.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힙합 문화와 패션이 본격적으로 유입됐으며 케이블TV를 통해 방영된 MTV는 스트리트 패션·록 등의 해외 문화를 소개하며 청소년들의 취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투시나 나이키 조던 같은 아이템이 인기를 얻은 것도 이 시기다. 다만 이러한 제품들은 당시 기준으로도 가격이 비싸 구매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이 쉽게 손에 넣기 어려웠다. 갖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한 아쉬움이 브랜드에 대한 동경으로 남아 오늘날 소비로까지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경제적 여력이 생긴 지금에서야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2030세대가 과거 유행했던 브랜드나 아이템에 반응하는 이유는 이와 다르다. 이들에게 1990년대 패션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스타일이다. 밑단이 바닥에 닿을 만큼 긴 와이드 팬츠, 짧은 크롭티, 헤드셋 등 과거 한 차례 유행했던 아이템들이 이 세대에게는 신선하면서도 '힙한'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이 역시 감성을 소비 기준으로 삼는 2030세대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늘 무언가를 탐색하고 발견하는 걸 좋아하는 2030세대에게 90년대 패션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새롭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다"며 "낯선 것이 주는 신선함이 감성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세대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힙한 스타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