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하다 헌신짝"…바람난 남편 떠나보낸 아내 '충격 변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마리안나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
선원 옷을 입은 자화상(1893). /마리안나 베레프킨 재단
한때 그녀는 촉망받는 천재 화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가 될 것”이라며 치켜세웠지요. 하지만 사랑이 모든 걸 바꿨습니다. 가난하지만 재능 있고 매력적인 네 살 연하의 청년을 만난 뒤, 그녀는 붓을 꺾어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녀는 청년과 평생 함께하며 그를 최고의 화가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돈으로 그를 먹여 살리고, 가르치고, 살뜰하게 내조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배신이었습니다. 남자는 그녀가 데려온 하녀를 유혹하고,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돈으로 남자는 물론 남자의 내연녀, 그 아들까지 먹여 살리는 기막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동안 바친 세월이 전부 헛수고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앞에는 더욱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분위기(1909). '절규'를 그리는 뭉크가 연상되는 표현주의 화풍으로, 초기 사실주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결국 그녀가 기댈 곳은 그림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말로는 못 할 분노와 좌절을 캔버스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러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강렬한 그림이 탄생했습니다. 한때 ‘러시아의 렘브란트’로 불렸던 그녀. 현대미술을 열어젖힌 주역 중 하나로 뒤늦게 재조명받고 있는, 마리안나 폰 베레프킨(1860~1938)의 기막힌 삶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잘못된 만남

마리안나는 러시아 제국의 명문가 중 명문가에서 태어난 ‘다이아몬드 수저’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가 살던 저택에는 18명의 하인이 있었습니다. 이건 도시에 있는 집의 하인만 센 숫자. 시골 영지까지 합치면 고용인 숫자는 100명을 훨씬 넘어갔지요. 그녀의 외할머니는 당대 가장 유명한 교육자로, 그녀가 쓴 교과서는 수십 년간 러시아의 필독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여러 언어에 능통한 화가였지요. 아버지는 러시아군 장군으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국가적인 영웅이었습니다.

마리안나 자신도 재능이 넘쳤습니다. 14세 때 처음 붓을 잡은 그녀는 단숨에 천재성을 드러냈습니다. 러시아 미술 최고의 거장 중 하나인 일리야 레핀은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며 “러시아의 렘브란트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뛰어난 사실주의 기법과 깊이 있는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마리안나의 그림은 러시아 미술계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베라 폰 베레프킨(1881). 어두운 명암 대비와 심리적 묘사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활동 초기 마리안나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다.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소녀(1883~1888). 마리안나는 러시아 미술의 거장인 일리야 레핀에게 미술을 배우며, 당대 러시아 미술의 주류였던 '이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 영향으로 슬라브 민족과 러시아 전통에 관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891년, 그녀가 서른한 살 때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주인공은 네 살 연하의 학생 알렉세이 야블렌스키(1864~1941). 퇴역 장교인 그는 가난한 화가 지망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매력과 야망,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거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를 본 마리안나는 꼼짝없이 반해버렸습니다. 둘은 곧 연인이 됐습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 미술 공부를 훨씬 오래 했던 마리안나는 야블렌스키를 가르치고 먹여 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야블렌스키가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소문난 바람둥이였고, 틈만 나면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게다가 연인인 마리안나의 재능을 은근히 질투하고 깎아내리기도 했지요.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안나는 이 남자를 너무도 사랑해서 자신의 곁에 꼭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런 비합리적인 결심을 합니다. “그래, 내가 예술을 그만두고 야블렌스키를 도와서 그를 천재 예술가로 키우겠어.” 자신의 재능을 꺾는 대신 사랑하는 남자를 최고로 만들겠다는, 일종의 ‘바보 온달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입니다.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의 초상(1896). 어두운 미래를 예견한 걸까. 초기의 사실주의는 옅어지고, 인상주의에 가까운 거친 붓질로 마무리된 작품이다.

결혼, 그리고 배신

동거 생활이 이어지던 1896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급히 달려온 딸과 야블렌스키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결혼해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아버지의 눈에는 딸의 ‘자유 연애’가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마리안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법에 따르면 사망한 고위 공직자의 자식은 막대한 연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안나의 경우 받을 수 있는 연금은 매년 7000루블. 구매력을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현재 가치로 1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이 매년 통장에 꽂히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성인인 경우, ‘미혼인 딸’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거든요. 결혼하면 연금은 끊기게 됩니다. 마리안나는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아버지, 연금이 끊기면 저희는 둘 다 거지가 돼요. 그냥 저희 둘이 결혼식 없이 사이좋게 살게요.”

결국 아버지도 딸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대신 그는 야블렌스키를 머리맡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남자의 명예를 걸고 내 딸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그리고 아버지와 야블렌스키는 서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블렌스키가 그린 자화상(1912).
장례를 치른 뒤 마리안나와 야블렌스키는 러시아를 떠나 독일 뮌헨으로 떠났습니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도시에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리안나는 뮌헨 부촌에 있는 대형 아파트 두 채를 터서 호화로운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거실 벽을 분홍색으로 칠해 ‘핑크 살롱’이라 불린 이곳은 곧 뮌헨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마리안나는 이곳에서 야블렌스키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최고급 물감과 재료를 사서 갖다줬고, 최신 미술 이론을 공부한 뒤 야블렌스키에게 개인 과외를 하듯 이를 가르쳐줬습니다. 유럽 전역으로 미술 기행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못다 피운 예술의 꽃을, 야블렌스키를 통해 대신 피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행복해보이는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집에는 네 사람이 살았습니다. 마리안나와 야블렌스키, 요리사, 그리고 헬레네라는 하녀였지요. 헬레네는 마리안나의 러시아 저택에서 일하던 가난한 하녀의 동생으로, 먹여 살리기 위해 직접 데려온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야블렌스키가 이 미성년자 하녀를 유혹했습니다. 마리안나의 집에서 마리안나가 주는 밥을 먹으며, 마리안나가 데려온 하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1902년 열여섯 살이 된 헬레네가 야블렌스키의 아이를 낳으면서 갈등이 폭발했습니다. 귀족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스캔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야블렌스키의 아들은 그의 조카인 것처럼 꾸며졌고, 헬레네는 여전히 하녀로 남았습니다. 결국 마리안나는 자신의 연인과, 그 연인이 건드린 하녀,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까지 모두를 자신의 돈으로 부양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표현주의, 폭발하다

“나는 부엌데기, 간호사, 가정교사가 되었다…. 집에서 숨을 쉬기가 힘들다.” 마리안나의 가정생활은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야블렌스키와 헬레네는 뻔뻔했습니다. 마리안나가 헬레네의 무례함을 지적하자 야블렌스키는 차갑게 말했습니다. “우린 한 지붕 아래 있어. 더는 불평하지 마.” 하지만 마리안나는 야블렌스키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야블렌스키를 천재 화가로 키우는 건 그녀가 인생을 걸고 키워온 ‘프로젝트’. 무엇보다도 그를 떠나는 건 사랑하는 아버지가 임종 직전 받아낸 맹세를 스스로 깨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마리안나는 붓을 들었습니다. 뭐라도 그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1906년, 그녀의 나이 46세 때. 붓을 놓은 지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검은 여인들(1910).
가을(1907).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지만 분위기는 우울하다. 하늘은 주황색이고, 검붉은색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귀향(1907). 힘들게 먼 길을 가는 여행자를 그린 작품이다. 마리안나의 작품 대부분은 싸구려 소재와 재료로 그려졌다. 좋은 재료를 야블렌스키에게 모두 양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뭘 그려야 할까. 사람? 자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도 그녀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좌절을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캔버스에 감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고흐, 고갱, 마티스의 그림을 본 충격이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초록 나무, 붉은 땅, 파란 하늘…. 그것보다 빨간 나무, 파란 땅, 초록 하늘이 더 진실할 수도 있어.” 강렬한 원색과 거친 형태에 내면을 쏟아붓는 ‘표현주의’ 그 자체였습니다.

예술가로서의 마리안나는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그녀는 칸딘스키와 함께 ‘신미술가협회(NKVM)’를 창립했습니다. 이 조직은 훗날 대표적인 표현주의 작가 그룹인 청기사파로 발전합니다. 추상미술을 처음 정의한 책으로 알려진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 담긴 핵심 사상들은, 이미 마리안나의 말과 일기 속에 존재했다는 게 현대 연구자들의 평가입니다. “예술은 자연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화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장례식(1907~1908).
붉은 도시(1909). 불협화음을 그림으로 옮긴 듯한 색채의 대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생활은 지옥 같았지만 예술적으로는 절정기를 맞이했던 시절. 하지만 1914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망쳤습니다. 러시아인인 마리안나와 야블렌스키는 하루아침에 ‘적’이 되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그들에게 “24시간 이내에 독일을 떠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마리안나 일행은 가구와 책, 그리고 수많은 그림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스위스로 탈출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남기고 간 막대한 재산은 훗날 약탈당하고 헐값에 경매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리안나, 홀로 서다

그들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생 프레(St. Prex)로 숨어들었습니다. 난방도 되지 않는 비좁은 집에서 마리안나, 야블렌스키와 헬레네, 두 사람의 아들은 숨 막히는 동거를 이어갔습니다. 여기에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 터졌습니다. 체제가 붕괴되면서 마리안나의 생명줄이었던 연금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평생 돈 걱정 없이 살던 마리안나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스위스 적십자사의 구호금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삶을 이어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1921년, 야블렌스키는 말했습니다. “독일에서 전시회를 열어야겠어. 그래야 다시 살길이 열려.” 그는 헬레네와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떠났습니다. 마리안나는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독일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야블렌스키와 하녀 헬레네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야블렌스키가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돌려주시오.” 30년 가까이 자신을 먹여 살리고, 가르치고, 지켜준 여자를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입니다.
풍경 속의 십자가(1909). 마리안나는 평생 종교적 주제에 매혹됐다.
넝마 장수(1917).
홀로 남겨진 마리안나는 스위스의 작은 어촌 아스코나(Ascona)로 이주했습니다. 물가가 저렴해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녀의 가난은 처참했습니다. 그림을 팔아 빵을 사고, 식당 주인이 나눠주는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한때 대부호였던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추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건 배신당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녀는 일기에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치 팔다리가 절단된 것 같다. 신경은 더 이상 통증을 전하지 않는다. 없어도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안나는 비운의 피해자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귀족다운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늘 친절했고,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그녀의 그림은 더욱 신비롭고 깊어졌습니다. 그녀는 아스코나의 풍경과 소박한 사람들을 심오한 색채로 그려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마리안나는 성경에서 나오는 이 구절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2(1926~1927). 이전보다 색채가 신비롭고 다양해졌다.
아베 마리아(1927).
그녀는 아스코나의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카페에 앉아 사람들에게 파리와 뮌헨 시절의 화려했던 예술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논나(Nonna,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자신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1922년 아스코나 시립 미술관 설립을 도우며 자신의 작품과 동료들의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 마리안나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나와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꺾이지 않는 영혼의 초상

그 뒤 야블렌스키는 어떻게 됐을까요. 썩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야블렌스키는 말년에 류마티스 관절염과 싸우며 고통받았습니다. 여기에 경제적 어려움이 겹쳤습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는 독일에서 전시 활동을 금지당했습니다. 수입이 끊겨 요양 치료비조차 댈 수 없었고, 미국의 후원자에게 도움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처참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1938년부터는 병세가 악화돼 전신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타인의 도움 없이는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생의 마지막 3년을 지옥 속에서 보냈습니다.
수도승(1932). 세상을 떠나기 4년전 그린 이 그림은 평생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묘사하고자 했던 마리안나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다만 미술사와 미술시장에서는 야블렌스키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 비싼 것은 100억원 이상 가격에 낙찰되기도 합니다. 야블렌스키의 작품 세계는 마리안나가 쌓아 올린 이론적 토대 위에서, 그녀의 돈으로 산 최고급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완성된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마리안나는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잊혀 ‘예술가의 뮤즈’ 정도로만 평가받았습니다. 화가로서 가장 빛나야 할 전성기에 붓을 꺾었고, 가난해진 뒤에는 싸구려 종이나 판지에 그림을 그려 보존 상태조차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최근 들어 마리안나의 위상은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전시 ‘표현주의자들’이 대표적입니다. 이 전시에서 마리안나는 바실리 칸딘스키, 가브리엘레 뮌터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과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졌습니다.

마리안나는 예술을 “세계관으로 승화돼 상징의 예술적 언어로 표현된, 응축된 사랑의 감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마리안나에게 예술이란 세상을 향한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아 자신만의 색과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비참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그 아픔을 원망으로 남기는 대신 예술을 통해 더 크고 깊은 사랑으로 바꾸어 냈지요.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마음의 진심을 보여줍니다. 이런 생각은 당대의 수많은 화가들, 그리고 후대의 현대미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화상(1910). 미술 역사상 가장 독특한 여성 자화상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신비로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보면 그 말을 인정하게 된다. /렌바흐하우스
예술가로 홀로 선 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나는 나다.” 더 이상 누군가의 후원자나 연인이 아닌 ‘나 자신’이 됐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작품을 그 어떤 명작보다 강렬한 색채의 드라마로 완성했습니다. 그 결과물은 비록 그 옛날 사실주의 그림처럼 매끄럽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에 더욱 깊고 진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번 기사는 Marianne von Werefkin - Die Russin aus dem Kreis des Blauen Reiters(Brigitte Robbeck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