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생각 아니었어?"…계약의 적, 모호함 [조대환의 영미계약법 스케치]

모호한 문구, 계약 당사자 간 해석 달라
'의사 불일치' 들어 계약 불성립으로 봐
세부 조건 명확한 언어로 문서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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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의 해석을 둘러싼 분쟁은 단순히 계약서 문구의 사전적 의미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쟁점은 계약 체결 당시 각 당사자가 그 문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즉 상호 의사의 일치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있다. 대표적인 판례가 바로 Raffles v. Wichelhaus 사건이다. 1864년 영국 리버풀의 무역상 위첼하우스(Wichelhaus)는 인도의 상인 래플스(Raffles)로부터 면화를 사들이는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엔 단지 "피어리스(Peerless)호를 통해 인도한다"는 문구만 있었고, 출항 시기나 선적 일정은 명시돼 있지 않았다.

'피어리스호'의 함정

문제는 인도 봄베이(뭄바이)에서 영국으로 항해하던 배 중 '피어리스'라는 이름의 선박이 두 척 있었다는 점이다. 한 척은 10월에, 다른 한 척은 12월에 출항했다. 위첼하우스는 가을 장사 시기에 맞춰 면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 때문에 10월에 출항한 배를 전제로 계약했다고 믿었다. 반면 래플스는 자신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배가 12월 출항하는 배였기에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12월 배가 도착하자 위첼하우스는 "내가 주문한 피어리스호가 아니다"라며 인수를 거부했다.

매수인은 10월 선적을, 매도인은 12월 선적을 주장하며 양측의 입장이 완전히 엇갈린 것이다. 법원은 양 당사자 모두가 '피어리스'라는 이름의 서로 다른 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상대방이 어떤 배를 언급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봤다. 계약의 본질적 요소에 대한 의사 합치가 존재하지 않아 구속력 있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판단이었다(Raffles v. Wichelhaus, 159 Eng. Rep. 375 (Ex.1864)).

'의사 표시의 불일치'에 주목한 법원

이 사건에서 법원이 주목한 건 당사자의 사기나 고의가 아니라 계약의 핵심 조건에 대한 당사자 상호 간의 의사 불일치였다. 계약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사항—이 사건에선 '어떤 피어리스호인가'—에 대해 양측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약이 성립하려면 당사자 간 의사 일치(meeting of minds)가 필요하다. 이 사건에선 계약의 기초가 되는 중요 사항인 '선박'에 대해 양측이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당사자 모두가 같은 단어를 사용했더라도 그 단어에 부여한 의미가 달랐다면 이는 의사 표시의 불일치에 해당한다.

계약의 표현이나 문장이 모호해 양측이 서로 다른 전제로 이해한 경우 그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계약의 효력에 관해 당사자 쌍방 모두가 그 부분의 내용을 몰랐거나, 알았으면서도 각자 다른 의미로 이해했다면 그 모호한 내용에 대한 당사자 상호 간 의사 합치가 없었으므로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생각이겠지'란 착각이 부른 사고

이 사건에서 법원이 제시한 법리는 Restatement Second of Contracts(이하 Restatement)에도 반영되었다. Restatement는 미국법률협회(ALI: American Law Institute)에서 선례로 정착된 영미 판례법(case law)의 주요 원리들을 정리한 문서다. 영미계약법의 원리는 1932년 처음 체계적으로 정립됐고, 1981년 Restatement를 통해 완성됐다.

Restatement에 따르면 계약 당사자들이 그들의 의사 표시에 실질적으로 다른 의미(materially different meaning)를 부여하고, 어느 당사자도 상대방에 의해 부여된 의미를 알지 못하거나 알 수 없을 때는(neither party knows or has reason to know the meaning attached by the other) 당사자 간 의사의 합치(mutual assent)가 없어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no contract). 당사자들이 같은 표현에 대해 동의의 의사 표시를 했더라도,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 경우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해서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계약은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나 '그럴 리 없다'는 낙관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당사자 모두 선의였지만, 서로가 떠올린 현실이 달랐다면 계약은 허공으로 흩어진 것이다.

현대판 피어리스호는 어디에나 있다

Raffles v. Wichelhaus 사건은 이름만 같았던 두 배에서 시작된 해프닝 같지만, 사실은 계약법의 핵심 원리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오늘날 피어리스호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계약서에 모든 중요한 내용을 모호하지 않게 기록하는 습관을 지닐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제 계약에선 날짜, 시간, 장소, 선박 이름, 사양, 규격 등 거래를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을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단어로 기재할 필요가 있다. 또 계약서에 쓰이는 언어는 일상 대화보다는 훨씬 더 차갑고 명확해야 한다. 서로의 마음이 맞았다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문서 속에 남은 분명한 합의만이 법정에서 살아남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피어리스호는 그 형태만 바꿔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정보기술(IT) 서비스 런칭 일정을 잡는 과정에서 발주사와 개발사가 출시일을 10월이라고만 두루뭉술하게 합의했다고 하자. 한쪽 당사자는 해당 소프트웨어 버전의 공개로, 다른 쪽 당사자는 해당 서비스의 정식 개시로 '출시일'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면 일정이 꼬이고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건설 자재 납품 계약서에 '5월 납품'이라고만 기재한 경우 한쪽 당사자는 5월 1일을, 다른 쪽 당사자는 5월 말로 서로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현장 공정이 중단되고, 최악의 경우 손해배상 소송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 상품 발주 계약에서 계약서에 모델명을 '갤럭시 S'라고만 적는다면 발주자는 최신 모델을, 납품자는 구형 모델을 떠올려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피어리스호의 함정은 지금도 유효하다. "서로 알겠지"라는 기대가 언제든지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분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계약은 당사자들의 마음속에 있지 않다. 날짜, 모델명, 사양, 인도 시점 등 세부 요소가 모두 문서로 모호하지 않게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확인돼야 한다. 160년 전 바닷길을 달리던 두 척의 피어리스호는 사라졌지만, 그 이름이 남긴 함정은 오늘날 계약 실무에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