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우림에서 길을 잃어본 자는 알 수 있지, 만그라네의 시선을

스페인 출신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한국 첫 개인전 ‘산과 친구되기’

경주 월지, 창덕궁 비원, 한국식 정원 등
한국적 풍경에서 영감받은 작품 선보여
해가 종적을 감춘 어스름한 저녁 무렵,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번개가 친다. 우거진 수풀 사이를 헤치고 들어선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이내 길을 잃고 만다. 어딘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는 이 장면은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되는 ‘산과 친구되기(Befriending the Mountains)’ 전시장의 풍경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진행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Daniel Steegmann Mangrané)가 조성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다.
마치 열대 우림 속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듯 금속 커튼을 걷으며 입장하게 되는 전시장.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작가는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들을 혼란케 한다. 우리가 인생이란 길 위에서 헤매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는 것처럼 전시장에서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최적의 동선을 인도해야 하는 전시장의 파티션은 수평이나 수직 구조가 아닌 사선으로 조성해 갈래길을 만들었다. 번개를 구현한 필라멘트 조명은 불규칙하게 깜빡거리다 그대로 꺼지기도 하며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리 저리 기웃거리다 코너를 꺾어 도달한 곳에서 관람객들은 비로소 하늘을 보게 된다. 전시장 중앙의 중정에 자리잡은 야외 정원을 통해서다.

경주에서 만난 달, 창덕궁에서의 경험 녹아든 공간

야외정원과 마주보고 있는 영상 작업 '물고기와 입맞추는 달'.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중정의 야외 정원을 비롯한 전시장 곳곳에는 그가 경험한 한국의 풍경이 녹아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금속 커튼 작업은 창덕궁 비원을 방문하고 느낀 감정들이 모티브가 됐다. 금빛 색상은 그날 궁을 비춘 햇살이나 내려앉은 석양이었을까 호기심을 자아내고, 커튼을 걷어내며 나는 금속의 마찰음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들의 소리같기도 하다. 커튼 중앙의 구멍 역시 어떤 뚜렷한 형태를 유추하게 한다. 이 역시 작가가 한국에서 만난 분명한 형상을 표현한 것이지만, 작가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아꼈다. 자신의 설명이 관람객의 감상에 한정을 두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시장 곳곳에는 총 네 개의 바위가 놓여 있다. 마치 번개를 맞은 듯 필라멘트 조명의 빛과 맞닿아 있는 이 돌들은 각각 ‘산’, ‘코끼리’, ‘사자’, ‘용’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그 형상과 모습이 닮아 이름붙기도 했지만, 한국의 애니미즘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야외정원과 마주한 벽을 통해 상영되는 비디오 작업 ‘물고기가 입맞추는 달(Fish Trying to Kiss the Moon)’은 작가가 경주 월지에서 만난 연못에 드리운 달과 물고기를 시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번개치는 돌(산), 돌과 LED 필라멘트 전구, 73 x 42 x 34cm, 240cm.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화산석의 구릉 위 놓인 소나무 두 그루가 만든 풍경, '번개치는 정원'.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유일하게 하늘과 마주할 수 있는 야외정원, ‘번개치는 정원’은 한 폭의 동양화를 담아낸 듯 소나무 두 그루가 만들어내는 정경이 조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공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다소 생경하기도 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자연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담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전시장 코너를 돌았을 때 관람객이 태초의 자연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받길 원했어요. 어떻게 보면 SF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자연을 빼앗겼다가 캡슐화된 자연풍경을 마주한 것 같기도 하죠. 마치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은 매우 추상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완전한 몰입의 공간

작가는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무엇을 봤는지’보다 전시를 관람하고 나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의 미학에 영감을 준 아티스트들이 배경이 된다. 작가는 어려서 생물학자를 꿈꿨을 정도로 동물과 식물을 사랑했다. 특히 아마존과 판타나우 등 열대 우림에 깊은 애정을 두어 브라질에 오래 머물며 활동해 왔다. 여기에 우연히 접하게 된 브라질의 대표적 현대미술가 엘리우 오이치시카와 리지아 클라크의 전시는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세계를 보여줬다. 두 작가는 관람객과 작품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 아티스트로, 다니엘 스티그만은 이 둘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홀로그램 (싹트는 손), Pulse hologram, 펄스 홀로그램, 25 x 20 cm.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관람객에게 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전시장의 여러 환경 중 번개는 특히 주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무게감 있는 요소다. 작가는 이를 관람객이 물리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끔 의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저는 전시를 진행할 때 항상 전시 공간에서의 무브먼트 또한 함께 고민해요. 작품을 통해 아이디어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작품에 대한 정보 없이 그저 전시장에서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만으로도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관람객에게 감정적인 경험, 지적인 경험, 물리적인 경험 이 세 가지 경험을 모두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아뜰리에 에르메스 안소연 아티스틱 디렉터 역시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보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상해 보라고 제안한다.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의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몰입감’이에요. 마치 열대 우림에서 길을 잃는 것처럼 그 안에 완전히 젖어 들어 자연의 일부가 돼는 경험을 발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전시는 내년 3월 8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