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앞 호통친 페라리처럼…익스트리마가 다시 울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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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포드 vs 페라리
인수, 합병을 통해 고유의 이미지를 잃어버린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들
30여 년 전의 순수한 에너지 그대로
소너스 파베르의 익스트리마(Extrema)
자동차에 인생을 바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드 V 페라리>. 자동차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브로맨스와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장거리 레이싱 장면 등은 특히 남자들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본래 A. J. 베임이라는 작가의 <Go Like Hell>이라는 원작을 각색한 영화로 실화에 기초를 하고 있다. 1950~60년대 미국의 상징 포드와 이탈리아의 페라리를 중심으로 레이서와 각 브랜드 경영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영화에서 포드의 중역이 페라리를 인수하려 이탈리아 본사에 회장을 찾으러 간 장면이 문득 생각났다. 대량 생산을 무기로 미국을 지배하던 대기업 포드의 페라리 인수 의견에 “흉하고 작은 차나 만드는 공장” 운운하며 결국엔 “포드의 회장은 헨리 포드가 아니라 헨리 포드 2세일 뿐”이라는 일갈을 날린다.
페라리는 당시 포드에 비하면 작은 회사였지만 한 사람이 엔진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모습 등에서 완전히 다른 회사임을 알 수 있었다. 엔초 페라리에게 모욕을 당한 포드는 르망 레이스에서 페라리를 박살 낼 차를 만들기 시작한다. 과연 포드는 레이싱 대회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차 페라리를 박살 낼 수 있었을까? 만일 박살을 냈다고 해서 포드가 페라리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만난 소너스 파베르
그중 소너스 파베르를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출시된 지가 이제 30년도 더 넘었지만 누군가의 집에선 여전히 가보처럼 그 생명을 연장하고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게 지인의 집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고 보니 최근에 중고로 구매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랬다. 지인 부부는 신혼 시절에 소너스 파베르의 익스트리마(Extrema)를 구매해 애지중지했다. 이 스피커가 출시되었던 1991년 당시 미국에서 가격이 무려 14,000달러였으니 당시 국내에서는 상당히 값비싼 하이엔드 스피커였다.
하지만 그 시절, 썩 좋은 대접을 못 해주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분한 이후 아쉬운 마음이 여전히 가슴 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중년이 된 그들 부부의 거실엔 익스트리마 스피커가 멋지고 당당하게, 철재 스탠드 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1953년생 탄노이 Autograph는 40여년 뒤에 태어난 익스트리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기술 발전과 디자인에 감탄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KT88 진공관을 채널당 네 알씩 투입해 만든 모노블럭 파워앰프는 쉼 없이 익스트리마를 울려댔다. 그리고 익스트리마는 절절히 울었다.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하고 창고에서 쉬어서 너무 답답했다는 듯. 음악 소스는 물론 세월의 때가 묻은 LP였다. 어린 시절 핑크 플로이드 등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했을 때 들었던 라그나로크의 데뷔 앨범은 특히 가슴을 움직였다. 스웨덴 출신인 그들의 음악은 1976년 발매된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낡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북유럽 신화에서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Ragnarök’이라는 단어와 달리 어쿠스틱 기타와 플루트, 멜로트론이 홍수를 이루며 낭만적인 분위기로 압도했다. 이제는 보기 힘든 순수한 에너지가 공간을 어루만졌다.
낭만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창의적이며 천재적인 엔지니어링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똘똘 뭉친 새로운 크리에이터들이 다시 그 자리에 들어서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과거 윌슨이나 이글스턴웍스 등이 차지했던 하이엔드 스피커 씬을 매지코나 YG 어쿠스틱스 같은 브랜드가 이어 나가고 있듯. 디지털 분야는 더욱 치열하고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한다. 과거의 전설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CH 프리시전, MSB 등이 새로운 시대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그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
거대 자본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스타트업 기업을 집어삼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자본주의 시대에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 오디오 메이커도 언젠가 거대 기업에 인수될 거라고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저 그대로 독립적인 회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그 옛날 페라리도 결국은 포드가 아닌 다른 기업에 회사를 팔아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거대 기업 포드의 임원들 앞에서 호통치던 엔초 페라리의 모습이 그립다.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