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의 '얼굴'에 새겨진 우울, 불안과 절망, 그 궤적을 따라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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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언정의 시네마테라피전각장인 임영규(박정민/권해효)의 살인은 돌발적 격정이 아니라, 오래 누적된 정서의 궤적 끝에서 발생한다.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임영규는 늘 놀림당하며 지옥 같은 날들을 보냈다고 스스로 자백한다. 그 회고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내면에는 각인된 ‘우울’이 존재한다. 그런 그가 피복 공장 정영희(신현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이루어 세상에서 처음 느껴보는 행복을 누린다. 평생에 자신의 얼굴 한번 볼 수 없고 본 적 없는 임영규는 정영희의 얼굴 역시 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지 못하지만 왠지 모를 기대를 품고 있었나 보다.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 같은 그 기대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타인의 평가와 사회적 규정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얼굴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
연상호 감독의 영화
어느 날 집을 찾아온 친구 놈이 임영규에게 묻는다. “그래도 심성은 곱지? 얼굴은 못 보는 게 나을 거야.” 그때 임영규는 깨닫는다. 이제야 무시에서 벗어나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어쩌면 정영희조차 그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라 자신을 우습게 보고 일부러 접근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결국은 모두가 자신을 놀려먹고 있었고 하필 못생긴 정영희를 만나 앞으로도 평생 멸시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큰 ‘불안’에 휩싸인다. 아내 정영희의 얼굴을 둘러싼 타인의 수군거림 속에 증폭된 불안이 영화를 지배한다. 임영규의 불안은 단순히 외부적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불확실성과 타인의 판단 속에서 생성되는 내적 긴장이라 할 수 있다.
결혼 이후에도 임영규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만 놀림 받던 상황에서 둘이 함께 놀림거리가 되는 최악의 수가 되었다. 적어도 임영규의 생각은 그러했다. 임영규는 자신의 아내 정영희를 둘러싼 폭언과 시선에 다시금 흔들린다. 내면의 우울은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이제 그의 존재는 타인의 언어와 시선에 의해 언제든 평가되고 조롱당하는 불안정한 자리로 고정된다. 영화는 불안의 극대화로 관객이 그의 시선과 감정을 오롯이 체험하게 만든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임영규의 정신을 옥죄어 가던 어느 날, 정영희의 입에서 “나를 못생기게만 보지 않으니”라는 자기규정이 흘러나오는 순간 임영규는 곧바로 완전한 ‘절망’에 이른다. 스스로 못생김을 인정한 정영희의 한 마디는 그렇게 그를 붕괴시켰다. 못생겼다고 손가락질받는 정영희의 얼굴은 임영규에게 더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실존적 파국을 선사한다. 이처럼 감독은 누구에게나 내재한 인간의 취약성과 사회적 압박이 폭발하는 순간을 관객에게 직면시킨다. 영화는 타인의 시선과 언어로 구성된 자아가 해체될 때 인간이 맞이하는 붕괴와 종국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임영규라는 인물을 통해 우울, 불안, 절망을 켜켜이 쌓은 영화는, 이 세 가지 정서의 연쇄가 폭력적 결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정영희의 얼굴을 둘러싼 주변의 반응은 결국 임영규의 삶을 붕괴시키는 촉매제로 작동했다.
살아있는 기적이라 불리며 장인의 경지에 오른 임영규가 아름다운 건 칭송받고 추한 건 멸시받는 세상에서 ‘모멸감’을 밀어내기 위해 스스로 한 선택이, 곧 정영희의 죽음이었다. 그렇게, 성취를 위해 얼굴은 사라졌다. 영화 <얼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무언가를 규정하고, 규정하기를 갈망하며, 또 얼마나 잔인하게 그 규정을 내면화시키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한 인간의 우울, 불안, 절망을 병렬 배치하여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평가와 사회적 규정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얼굴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 <얼굴>을 통해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압박 속에서 인간이 겪는 우울, 불안, 절망의 형상을 포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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