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올려 '혁신 신약' 밀어주기…건보 적용도 100일 내로 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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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약 가격 최대 25% 낮춘다
내년 하반기부터…신약은 인상
보건복지부는 2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신약 등재·평가 체계를 개편하고 제네릭 약가를 최대 25% 낮추는 등의 내용을 담은 ‘약가제도 개선 방안’을 보고했다. 신약 약값 기준 변경은 2007년 선별급여등재 제도를 도입한 후 18년 만, 제네릭 약값 인하는 2012년 일괄약가인하 제도를 시행한 후 13년 만이다.
정부는 신약의 경제성을 평가할 때 비용 효과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ICER 임계값(급여 허가 상한액)을 2027년부터 적정 수준으로 상향하기로 했다. 생존위협 질환 등 질병의 위중도, 치료적 이익, 재정 영향 등을 고려한 가중치를 도입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또 내년 하반기부터 제네릭 가격을 오리지널 의약품 최초 약가의 53.55%에서 40%대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한다. 자체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제네릭 가격은 인하폭을 확대한다.
이중규 복지부 보험정책국장은 “의견 수렴을 거쳐 내년 2월께 최종안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약값 개편…신약 올리고 복제약 최대 25% 깎는다
트럼프 새 약가 정책 후폭풍…韓 제약업계 재편 신호탄
‘0.09% vs 0.78%.’ 한국과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혁신 의약품 지출 비중이다. 한국 건강보험 등이 신약에 지출하는 비용은 선진국 중 가장 낮다. 글로벌 제약사는 물론 국내 제약사조차 신약의 한국 출시를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르는 이유다. 그간 높은 약가 부담을 감수하던 미국 정부가 자국 약가를 최혜국 수준으로 대우해달라고 제약사들에 요구하면서 세계 의약품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 정부가 10여 년간 손대지 않은 약가 제도 개편에 나선 배경이다.◇ 美 약가 손질이 부추긴 제도 개편
28일 보건복지부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고한 약가제도 개편안에 따르면 2027년부터 생명에 직결되는 질환 등의 치료제는 건강보험 약가가 올라간다. 정부가 2006년 이후 처음으로 신약 가격을 책정하는 지표(ICER)를 개편하기로 하면서다.한국은 건강보험 약품비 중 신약 지출 비중이 13.5%(2017~2022년 누적 기준)로 튀르키예(16.1%)보다 낮다. 신약 허가를 신청한 뒤 환자 치료에 쓰일 때까지 걸리는 기간도 길다. 미국제약협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에서 신약 허가에는 28개월이, 건강보험 시장 진입엔 18개월이 걸렸다. 허가를 신청한 뒤 46개월이 지나야 환자가 보험 혜택을 받고 약을 쓸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에선 4개월, 일본은 18개월 만에 약을 사용할 수 있다.
한국을 신약 출시 후순위로 미루거나 신약을 철수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한국의 저렴한 약가가 노출돼 중국 등 다른 나라와 가격을 협상할 때 ‘위험 요인’이 되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약가 정책 기조를 바꾼 것도 한국 정부엔 부담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미국제약협회 관계자들이 한국을 찾아 정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의 약가 실무자를 만나 신약 약가 인상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신약 중심 제도 개편 시동
정부는 신약 약가 기준치 개편과 함께 약가 유연계약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내년 2분기부터 신약은 물론 특허가 끝난 오리지널 의약품,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도 국내 약가는 공개되지 않는다. 공개되는 표시가격과 실제 계약금액을 다르게 설정해 약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특허가 끝난 뒤 약가가 공개되는 부담 탓에 한국 시장에서 신약을 철수하는 사례를 없앨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약을 쓰는 환자군(적응증)이 늘면 약가가 내려가는 구조도 바꾸기로 했다. 미국 머크(MSD)의 면역관문억제제 키트루다처럼 하나의 약으로 여러 질환을 치료하는 항암제가 늘어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내년부터 건강보험 항목에 희소질환 치료제를 포함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최대 240일에서 100일 이내로 단축한다.
◇ 국내 제약산업 재편 신호탄 될까
제네릭(복제약) 약가는 내년 7월께부터 오리지널 의약품의 53.55%에서 40% 정도로 대폭 깎인다. 새로 등재되는 제네릭 약가는 바로 적용하고, 2012년 건강보험시장에 진입한 뒤 13년간 약가 변동이 없던 품목은 3년에 걸쳐 약가를 조정할 계획이다. 이후 2013년, 2014년 등재 의약품 등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오리지널 특허가 끝난 뒤 제네릭 제품이 10개 이상 등재되면 약가는 더 낮아진다.제약사의 개발 동력이 떨어져 생산이 줄고 있는 퇴장 방지 의약품, 필수 의약품 등은 약가를 좀 더 높이기로 했다. 연구개발(R&D) 비용을 많이 쓰는 혁신형 제약기업도 다른 제약사보다 제네릭 약가를 좀 더 높게 받을 수 있다. 매출 대비 R&D 비율이 상위 30%인 기업은 제네릭 약가를 오리지널의 68%까지 높여 받는다. 나머지 혁신형 제약기업은 60%, 신약 개발을 위한 임상 2상 승인 실적이 3년간 한 건 이상인 기업은 55%까지 약가가 정해진다.
약가 사후관리는 매년 4월과 10월로 정례화한다. 수시로 이뤄지는 약가 조정 때문에 기업의 사업 불확실성 크다는 요구를 반영한 조치다. 신약 가치를 재평가하고 조정하는 절차는 3~5년마다 주기적으로 시행해 약품비 지출을 관리하기로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