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과 싸울 무기인데…100년 기술 '레거시 공학' 연구 생태계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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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DC·아스콘·발전 터빈…박사급 인력 키울 교수가 없다
AI 데이터센터 핵심기술 HVDC
고려대, 교수 모집 세 차례 실패
中, 축적 필요한 산업에 약점
◇ ‘HVDC 국산화’ 한다는데 …
변압기 설계는 1980년대만 해도 공대에서 인기 분야였다. 하지만 1990년대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이 각광받으면서 각 대학의 전기·전자·정보공학부 내 전공자가 급감했다. 문제는 변압기 설계와 같은 레거시(legacy) 공학이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레거시 공학이란 산업 표준이 이미 확립돼 있고, 구조·원리가 100년 이상 변하지 않은 기술을 의미한다. 변압기 설계만 해도 거의 모든 제품이 1800년대 중후반 마이클 패러데이, 니콜라 테슬라 등이 정립한 전자기 유도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일본 히타치가 스웨덴에 제조 공장을 둔 ABB 전력그리드부문을 인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HVDC 분야 강자는 히타치에너지를 비롯해 독일 지멘스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세 곳으로 현재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 연구 생태계는 붕괴 일보 직전
레거시 공학 인력 공백은 변압기 설계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려대 건축사회환경공학부도 최근 아스팔트·콘크리트(아스콘) 전공 교원을 세 차례 공모했지만 모두 무산됐다. 서울대 공대는 발전 터빈 연구 명맥이 끊길 것이란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현재 전공 교수가 한 명뿐이다. 19세기에 개발된 것으로 알려진 터빈 기술은 액화천연가스(LNG)에서 수소 터빈으로 기술 업그레이드가 진행 중이고, 방위산업 무기용 엔진의 국산화와도 맞닿아 있는 등 산업적 파급력이 여전히 지대하다.이 같은 연구 명맥의 중단은 관련 생태계를 파괴한다. 수도권의 한 공대 교수는 “공학 인력이 한 번 끊기면 다시 산업을 ‘재부팅’하는 데 최소 수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연호 한국전기연구원 친환경전력기기 연구센터장은 “전류 차단기 분야 역시 젊은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레거시 공학이야말로 중국과 경쟁할 강력한 무기라고 입을 모은다. 산업계 관계자는 “최근 중국 기업들이 한국과 일본 정밀가공업체들을 인수하거나 지분 투자를 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며 “AI, 양자컴퓨팅, 드론 등 신흥 산업은 경쟁의 출발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중국이 앞서갈 수 있지만 100년 넘게 기술력을 축적해야만 하는 레거시 공학 분야에선 중국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아스콘 생산업체 관계자는 “최근 자갈과 콘크리트 침목으로 된 철도 노반을 아스콘으로 전환해 고정력을 높이는 기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며 “도로 포장 중심이던 기술을 철도, 항만, 공항 활주로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젊은 고급 인력을 찾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변압기 제조업계 관계자는 “기업은 ‘넥스트 HVDC’ 기술 개발로 앞서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는데 박사급 인력 확보가 잘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620㎞ 길이 해저 송전망을 구축하는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은 외산 HVDC 기술에 의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려다.
▶초고압직류송전(HVDC)
발전소에서 생산한 교류(AC) 전력을 고전압 직류(DC)로 바꿔 먼 거리까지 효율적으로 보내는 송전 기술.
▶레거시 공학
구조 및 원리가 100년 이상 변하지 않고, 산업 표준이 확립된 기술을 의미한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