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삼겹살 값 올리는 건 사장님이 아니다
입력
수정
지면A26
역대 정부들 서민생계 앞세워
식료품 물가 상승 질타
수요·공급의 법칙 무시한
자의적 가격 인상은 불가능
건전한 재정·통화 관리와
외환시장 안정이 정부 역할
유승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그건 아니에요’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던 순간 “아이들 의견이 틀렸다고 하지 말라”던 선배의 말이 기억났다. 그래, 사장님이 아주아주 착한 사람이면 삼겹살값을 안 올릴 수도 있지. “아, 다른 이유가 있어요”라며 에둘러 말했다. 하긴 어른들을 모아 놓고 같은 질문을 했어도 비슷하게 답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틀린 답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역대 정부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기름값을 노골적으로 겨냥했고 윤석열 정부도 가공식품 가격에 적극 개입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얼마 전 식료품 물가 상승을 지적하며 “(기업들의) 고삐를 놔주면 횡포를 부리고 폭리를 취한다. 이런 문제를 통제하는 것이 정부”라고 말했다.
그러나 삼겹살값이 오른 게 사장님 책임이 아니듯이 물가를 기업이 끌어올리지는 않는다. 물가 상승은 공급 감소 또는 수요 증가의 결과일 뿐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지적한 식료품 물가도 이와 같은 기초 경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식료품 공급 측면에서 한국은 숙명적인 취약점을 안고 있다. 인구에 비해 국토 면적이 좁고 그나마 70%는 산이다. 그 때문에 인구 1인당 경지 면적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영농 규모가 영세하고 농업 인구의 55%가 65세 이상 고령층이어서 농업 생산성도 낮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했던 여름 폭염과 9월 이후 잦은 비가 채소와 과일 작황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지급한 민생회복 소비쿠폰은 수요를 부추겼다.
통화량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광의통화(M2)는 전년 동월 대비 7.1% 증가했다. 1월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환율마저 달러당 1400원이 뉴노멀이 됐다. 식량 자급률이 50%도 안 되는 나라에서 환율 상승은 농산물과 식료품 가격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일부 악덕 업자와 독과점 상인이 시장을 왜곡한다는 반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유통망을 몇 개 회사가 독과점하고 있지 않나”라는 이 대통령과 “업체들이 원재료 가격 인상을 핑계 삼아 밥상 물가 부풀리기를 한다”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에서 그런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경제학 교과서엔 독점 생산자가 한계비용보다 높은 수준에서 가격을 설정한다고 나온다. 간단히 말하면 필요 이상으로 비싼 가격을 받아 높은 이윤을 얻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독점 생산자 역시 수요·공급의 법칙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더구나 수많은 대체재가 존재하는 식료품 시장에서 특정 업체가 비정상적으로 비싼 가격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다.
물가 안정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지리적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농업에 시장 요소를 강화하면 생산성은 높일 수 있다. 물가 상승은 통화 가치 하락과 같다. 따라서 재정과 통화를 건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물가 안정의 전제 조건이다. 물가 요인만 생각한다면 빚까지 내서 돈을 나눠 주는 일은 웬만한 비상 상황이 아닌 한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미 관세 협상과도 맞물린 외환시장 안정이 시급하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 역할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