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트럼프도 탄복할 정주영의 조선 인재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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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0
관세협상 일등공신 조선업
정주영의 50년전 인재 투자가
트럼프도 탐내는 기술력 꽃피워
한미동맹의 새로운 상징
이공계 살리기로 인력난 풀고
바위 규제 노란봉투법은 재고해야
윤성민 수석논설위원
하지만 트럼프 입장에서 이런 과정이 유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2차대전 기간 전 세계 선박 건조량의 70%를 장악한 미국의 시장 점유율은 이제 1%도 되지 않는다. 미국 군사력의 원천인 해군력을 봐도 기본 지표인 군함 수는 오래전 중국에 역전됐다. 미국의 조선 생태계는 와해된 수준이다. 부품 공급망이 무너진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인재풀이 바닥났다. 미국에 조선공학과가 있는 대학은 두 곳에 불과하고 한 해 졸업생은 100명 남짓이다. 설계도가 있어도 숙련공이 없어서 배를 만들 수 없다. 한화오션 퇴직 엔지니어들이 미국에 파견돼 용접 등 핵심 공정을 교육하고 있다.
세계 최강 경쟁력을 지닌 한국 조선산업이 태동한 건 현대울산조선소가 설립된 1972년이다. 당시 한국 조선 인력 구조는 지금의 미국보다 훨씬 못했다. K조선의 인재 양성 토대를 구축한 사람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다. 정주영은 조선소 독을 지으면서 초대형 유조선(VLCC)을 동시에 건조한 세계 조선업계 ‘불후의 전설’이다. 그는 현대조선소가 생산에 착수한 25만t급 VLCC와 똑같은 배를 만들고 있던 스코틀랜드 스콧리스고 조선소에 직원 44명을 6개월간 연수 보냈다.
김포공항을 떠난 연수자들은 도쿄, 앵커리지, 코펜하겐을 거쳐 런던까지 간 뒤 하루를 자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내려 버스를 타고 조선소가 있는 그리녹에 닿았다. 집 두 채를 전세 내고 밥하는 아주머니까지 딸려 보냈다. 25만t급 VLCC에 대해 길이는 110층짜리 건물을 눕혀놓은 것이고 갑판은 축구장 두 개 크기이며 기관실에는 마산 전역을 다루는 전력 공급량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알던 그들에게 현장은 ‘거대하고 막막한’ 곳이었다.
현지 직원 동선을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며 체크했다. 저녁때마다 그날 보고 들은 것을 관련 자료와 스케치까지 덧붙여 소상히 기록해 먹지를 넣어 사본 두 장을 만든 뒤, 팩스도 없던 시절이라 원본은 항공 우편으로 한국에 보냈다. 국내 동료들이 새벽에 웅덩이 물에 얼굴을 씻고 일터로 나가 늦은 밤 숙소에서 구두끈도 못 푼 채 곯아떨어지는 때에 그들의 작업에 보탬이 되기 위해 선진 조선소의 모든 것을 담고자 했다. 정주영은 양고기를 사주며 연수생들을 격려했다. 일부는 귀국길에 일본 가와사키중공업 계열 조선소에서 한 달간 추가 연수도 받았다. 연수생들에게 ‘조선 입국’의 사명감을 지켜준 건 정주영의 이 두 마디였다. “쫄지들 마. 빌딩에 프로펠러 달면 그게 배다” “이봐 해봤어? 식자우환이구먼.” [K-조선의 여명과 스코틀랜드 그리녹의 함성]
이런 열정을 자양분 삼아 K조선은 미국 대통령이 탐낼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축적의 시간’에 쌓아 올린 소중한 산업 노하우와 생태계 자산을 날려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조선업 전반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조선 업종 미충원율은 14.7%로 전 산업 평균 8.3%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다. 숙련공 이탈로 인한 인력 공백을 외국인 근로자로 채우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대학 조선 관련 학과 통폐합으로 학생이 줄어드는 것도 인력난의 한 원인이다. 의대 광풍을 잠재우고 이공계 회생을 위한 특단의 사회적 유인책이 절실하다.
원청 대기업의 노사 교섭 대상이 수백 개 하청 기업으로까지 무차별 확장될 수 있는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은 반드시 재고돼야 한다. 복잡한 하청 구조를 지닌 조선업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관세협상의 일등 공신을 이런 식으로 옥죄선 안 된다. 미국 조선업이 몰락한 것 역시 규제와 정책 홀대가 켜켜이 쌓인 후과다. 한·미 동맹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른 조선업의 르네상스를 국가적으로 지원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