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극장은 도시의 정신"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인터뷰
-예술의전당 공채 1기 출신, 40여 년 외길 공연계 베테랑
-달라진 세종문화회관, 자체 제작 히트작 쏟아져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사진=임형택 기자
“극장은 도시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입니다.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 로열 오페라하우스가 있고, 프랑스 파리 중심에 파리 오페라극장이 있는 것처럼. 유럽 도시에 가면 시청, 성당과 함께 도시의 중심에 극장이 꼭 있어요. 서울에선 세종문화회관이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서울 광화문 한가운데 위치한 세종문화회관. 입지와 접근성, 역사적 의미로도 세종문화회관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세종문화회관은 ‘높은 분들이 드나드는 고급 예술 공간’으로 상징성이 강했다. 유난히 묵직해 보이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이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온종일 드나들고, 보다 편하게 극장 주변에 머문다. 눈높이를 낮추고 모두를 향해 손을 내미는 ‘친절한 극장’으로 변모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의 극장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안호상 사장은 24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상과 예술은 경계가 없어야 한다. 세종문화회관이 서울시민 모두의 정신적 휴식 공간으로 기능하길 바랐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지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 바로 ‘세종라운지’다. 다양한 문화예술 서적이 비치되어 있고 누구든 편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로비의 작은 쉼터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로비 '세종라운지'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임형택 기자
“공연장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종라운지는 그런 바람에서 출발했습니다.”

극장 주변의 모습도 확 달라졌다. 공연 없는 시간대 텅텅 비어 있던 극장 앞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오가기 시작했고, 점심·저녁 잠깐 장사로 겨우 유지되던 인근 식당가도 덩달아 웃음꽃이 피었다. 이제는 공연이 없는 날에도 세종문화회관 인접 공간을 활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세종문화회관이 올리는 공연 프로그램도 함께 변화했다. 대관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 폭넓은 세대와 취향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자체 제작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안 사장이 ‘제작극장’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면서다. 전체 극장 예산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산하 예술단체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구조를 재정비했다. 서울시무용단을 비롯해 서울시합창단, 뮤지컬단, 극단, 오페라단, 국악관현악단 등 7개 예술 단체의 제작 작품 중심으로 연간 시즌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안 사장은 “그동안 우리는 극장과 예술단체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았고 각자도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나 발레단을 보면 거의 다 국공립 단체”라며 “우리는 그런 해외 국공립 단체들을 모셔 오려고 쫓아다니는데, 왜 그래야만 할까?라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고민 끝에 내놓은 작품이 고선웅 연출의 ‘퉁소소리’(극단), 정구호 패션 디자이너가 연출로 참여한 ‘일무’(무용단), 발레단의 ‘데카당스’, 뮤지컬단의 ‘다시, 봄’ 등이다. 그 중 ‘퉁소소리’는 2025년 백상연극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냈다. 종묘제례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무용 ‘일무’는 미국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올랐다.

자체 제작 공연의 연이어 흥행하면서, 세종문화회관은 2023년 극장 자체 수익 219억 원을 기록했다. 법인화 이후 24년 만의 첫 200억 돌파이자 역대 최고 수익이다.

문화적으로도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실험적인 시도를 담은 ‘싱크 넥스트 24’는 공연 2편이 영국과 캐나다 주요 페스티벌에 초대받았다. 공연계에 처음으로 구독 서비스를 최초 도입하고, 자체 제작 공연 최대 40% 할인 혜택을 제공해 극장 접근성도 높였다. 안 사장은 “‘싱크 넥스트’는 세종문화회관의 ‘예술적 앵커’와 같은 프로그램”이라며 “예술 창작의 고통 속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무대를 열어주는 게 공공극장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공연장 외연을 벗어나 트렌디한 마케팅도 감행했다. 성수동에서 ‘싱크 넥스트’ 팝업 공간을 열었고, 지난 4월 더현대서울에서 ‘해리포터 팝업’을 열어 대히트를 쳤다. 이 모든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안 사장은 “리더가 방향을 제시하고 신호를 주면 조직원들의 역량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리더십은 조직의 건강성을 회복시키는 일”이라며 “평가와 보상, 예측 가능한 룰이 정착되면 조직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안 사장의 취임 이후 세종문화회관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조직 내부 건강성이 회복되면서 자발적으로 조직원들이 이뤄낸 변화라는 설명이다.

그는 명실상부 공연계 베테랑이다. 1984년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입사해 23년간 몸담았다. 이후 서울문화재단 대표, 국립극장장(2012~2017),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원장을 거쳐 2021년부터 세종문화회관 대표로 재직 중이다. 몸담은 기관마다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1999년 역사적인 ‘예술의전당 조용필 콘서트’를 성사시켰고, 2000년대 초반 ‘말러 교향곡 시리즈’라는 장기 흥행 기획도 이끌었다. 국립극장에서는 창극 흥행의 붐을 일으켰고,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싱크 넥스트’ 기획까지. 거쳐간 곳마다 오랫동안 회자될 흔적이 남았다.

예술경영인으로서 어딜 가든 성과를 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40년 넘게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관객은 왜 이곳에 오는가? 나는 누구에게 이 공연을 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공연의 작품성이든 유명 인물 때문이든, 시대의 미학과 맞닿은 이유가 있어야 관객은 극장을 찾습니다.”

특히 한국적인 소재를 보편적인 메시지로 전환하는 감각이 탁월한 그는 이런 통찰도 내놓았다.

“관객들은 전통을 보러 오는 게 아닙니다. 저마다의 고민, 아픔, 욕망을 안고 극장을 찾습니다. 대중이 느끼는 이 시대를 예술적 언어로 담는 것. 그게 동시대성이죠. 이 시대의 미학적 코드가 담기고 이 시대의 아픔이 담겨야 관객들이 반응합니다.”

영화, 책, 뮤지컬, 음악 등 K-콘텐츠의 세계적 인기 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분석한다.

“세계가 주목하는 건 한국의 전통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즉 ‘컨템포러리 코리아’입니다. ‘오징어 게임’, 영화 ‘기생충’, 한강의 ‘소년이 온다’, K-드라마 모두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담은 이 시대 한국인의 이야기죠. 글로벌 콘텐츠가 블록버스터화되면서 지역 문화가 사라지는 시대지만, 한국은 여전히 비극적이면서 따뜻한, 깊은 감정의 로컬 이야기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4년째 재직 중인 그는 아직도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와 같다. 그는 “최근에는 서울 여의도 공원에 ‘제2 세종문화회관’ 건립이 확정되었고, 세종문화회관은 2028년 개관 5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사진=임형택 기자
조민선 기자/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