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좌절하고 있다면, 주 샤오메이의 바흐를 들어라

[arte] 김수미의 최애의 최애

피아니스트 주 샤오메이
문화대혁명으로 음악 인생 단절

바흐 연주하며
연주가로서의 삶 되찾아
한 사람의 예술은 그 자신의 삶과 상호작용 한다고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은 의외로 허술한 면도 있고 대부분 흠집투성이다. 상처가 많다고 덮어놓고 무작정 추앙하지는 않는다. 나무가 갑작스러운 변화나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균열을 불그스름한 표피로 멋스럽게 변모시키듯, 자기 결함과 상처를 끝내 고유한 예술로 승화한 이들을 동경한다. 생의 풍파에 깎이고 도려내어진 자국을 지닌 이들의 예술에는 감상자의 은밀한 내적 상처와 공명할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주 샤오메이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음반을 즐겨 듣는다. 바흐의 다성음악을 피아노 연주로 듣고 있으면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개의 돌림노래를 능숙하게 저글링하는 경지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그의 연주는 유독 그랬다. 선율들이 각자의 선로를 공고히 지키니 애써 집중하지 않아도 모든 노랫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와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숱한 곡절 끝에 자신을 거뜬히 조율하게 된 사람의 내면이 이러하려나? 외부의 말과 글 때문에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 충돌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될 것 같은 날이면 그의 가지런한 푸가 연주를 찾게 됐다.
피아니스트 주 샤오메이(1949~). / 사진출처. 마르코폴로
주 샤오메이의 자전적 에세이 『강과 그 비밀』을 통해 정작 그의 삶에서 가장 결여된 것이 균형과 안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 정치 체제의 광풍에 그의 삶은 그야말로 통째로 휩쓸렸다. 일찍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여 예술계 학교에 진학했지만, 문화대혁명과 함께 그의 거취는 수용소로 옮겨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농사일을 하고,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씻어내라며 매일 자아비판과 고발을 강요당하는 사이 그도 세뇌에 길들었다. 피아노를 소유한 부모가 부르주아 출신의 반동분자가 아닌지 의심했고, 서양 음악과 문물을 향유했다는 이유로 정든 이들이 홍위병에 무차별하게 돌팔매질 당할 때 외면했으며, 직접 친구를 고발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을 되찾았다. 수용소 생활이 끝난 뒤 정부에서 준 무용학교 반주자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 음악 공부를 위해 미국과 프랑스로 떠났다.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피아노를 빌려 쳤고, 이방인으로 부유하는 10여년간 가정부와 청소부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하고 생계를 유지했다. 46세에 유럽 무대에 데뷔하고, 50세에 첫 음반을 발매했다. 광기 어린 시대에 희생된 이들의 명예 회복을 바라며 자신의 상처와 어두웠던 날들까지 고스란히 담아 책으로 썼다. 현재는 파리에서 조용히 음악을 가르친다는 근황이 내가 아는 전부다. 체제에 의해 본성이 훼손된 청년과 한 시대의 파도를 빠져나와 성찰하는 구도적인 피아니스트. 그 넓은 간극의 중심에 바흐가 있다.
주 샤오메이 저서 『강과 그 비밀』 (배성옥 옮김). / 사진출처. 마르코폴로
바흐의 음악은 주 샤오메이의 삶과 크게 두 번 얽혔다. 처음엔 수용소에서였다. 자신의 내부가 어딘가 잘못 조립되어 간다는 사실을 인식한 뒤, 마오 주석의 부인이 좋아하는 ‘양판희(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립된 무대 예술 작품)’를 연습한다고 둘러대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반복해 치는 깡을 발휘했다. 바흐의 작품은 여러 성부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손가락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했는데, 그러는 동안 태극권 무술의 평형감각처럼 정신력에서 음악성이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번째는 유학 시절 얹혀 지내던 친구 집 책장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악보를 발견한 것이다. 자신이 집에 있을 때는 피아노 연습을 자제해달라던 친구조차 그 곡만큼은 언제든 연습해도 좋다고 평한 것이 시작이었다. 불혹의 나이로 연 파리 생-쥘리앵 성당의 첫 독주회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호평받았고, 이를 계기로 주 샤오메이는 점차 피아니스트로서 음악적 미래를 그려가게 됐다.

바흐의 음악이 주 샤오메이의 삶을 강하게 끌어당긴 이유는, 그들의 고난과 결핍에 닮은 부분이 있기 때문 아닐까? 바흐는 일찍부터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열 살 무렵엔 양친을 모두 여읜 상태였고, 첫 번째 부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자녀 중 몇몇 또한 어린 나이에 죽거나 방탕하게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아른슈타트, 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로 일터를 옮기는 동안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은 참지 않는 바람에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 바이마르에서는 사직을 고집하다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혔으며, 마르틴 게크에 따르면 바흐 생애 마지막 몇 년은 ‘스스로 정한 준퇴임 상태’였을 만큼 좀처럼 직장에 대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바흐가 받들었던 종교음악은 낡은 유물 취급을 받았다. 어딘가에 온전히 포용 되는 느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일상의 안정감은 바흐의 삶에도 드물었을 것이다.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2권 푸가 17번 내림가장조 BWV886 자필 악보.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수록. / 사진출처. 풍월당
가장 소중한 음악이 오히려 자신을 더 겉돌게 만들 때, 두 사람이 택한 대처 방식 또한 유사하다. 자기만의 음악에 몰입한 것이다. 불만이 많고 가끔 욱하기도 했다는 바흐가 당장의 맞짱보다 더 몰두한 것은 자기 최선의 음악이었다. 파울 힌데미트는 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의무를 부여하는 유산」에서 바흐가 특히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끊임없이 자기 작품을 고치며 완성도를 높이려 했던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바흐 음악과 함께 유산으로 받은 가장 값진 것”(책 『바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 중)이라고 말했다.

주 샤오메이는 타국에서 별다른 경력을 쌓지 못하던 긴 시간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음표 하나하나가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될 때까지 연습을 거듭했다. 최고를 추구했던 작곡가의 음악이 연주자에게도 같은 자세를 이끌어낸 것은 아닐까? 주 샤오메이는 최상의 울림을 찾는 ‘피아노 명상’을 통해 현실적 고민이나 조급함에서 벗어나 음악과의 온전한 일체감을 경험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바흐의 음악과 노자의 사상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관을 확립했다.

삶의 불안정성은 때로 더 많은 동력을 일으킨다. 바흐와 주샤오메이는 그 에너지를 현실과 타협하거나 자신을 당장 드러내기 위해 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음악적 결과물이 최선이 되는 길에만 매진했다. 바흐에게는 작곡이, 주 샤오메이에게는 피아노가 자기 존재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물간 음악을 만든다는 취급을 받았던 바흐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모든 음악의 발원지로서 제 위상을 되찾았고, 바흐 음악을 매개로 주 샤오메이 또한 연주자로서 자신의 길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
누구에게나 각자의 알맹이가 있다. 그 알맹이가 대단히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져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태껏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온 곳, 자꾸만 관심을 끄는 곳, 때로는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 속에서도 알맹이는 발견된다.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끊임없이 시련과 풍파가 날아들며 옭아맬수록, 바흐와 주 샤오메이처럼 자신의 알맹이를 쥐고 부단히 다듬어보면 어떨까. 눈부신 보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돌파할 때 유용한 짱돌 하나쯤은 남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예술이 그의 삶과 상호작용한다는 믿음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삶이 예술에 반영되기도 하지만, 한 발짝 더 개선된 예술이 그 주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즉, 손톱만큼이라도 더 매끈해진 알맹이가 우리의 삶과 정신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한 주 샤오메이는 어느 토크쇼에서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길 바라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을, 눈앞이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속에서도 치열하게 자신의 알맹이를 붙들고 분투하는 이들과 나누고 싶다. “넌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 이리와, 내 너에게 바흐를 소개해 주마.”

(2014년 바흐 페스티벌에서 주샤오메이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실황. 연주가 이뤄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는 바흐가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으로 바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김수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