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을 떠" 작지만 큰 외침…슬픈 만큼 아름다운 '웃는 남자' [리뷰]

뮤지컬 '웃는 남자' 리뷰
빅토르 위고 원작…4번째 시즌
'제작비 175억' 압도적 규모의 무대
섬세한 연출·감성적 음악 꽉 채워
'첫 합류' NCT 도영, 연기·노래 호평
뮤지컬 '웃는 남자'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제공
"그 눈을 떠. 지금이야. 가진 것을 나눠봐"

여왕과 귀족 신분의 상원의원들이 모인 의회장. 연설에 나선 남성이 입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내자 장내가 술렁였다. 입이 양옆으로 길게 찢긴 기이한 얼굴의 그는 귀족들을 향해 "더 늦으면 안 된다"며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제발 눈을 뜨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뮤지컬 '웃는 남자'의 한 장면이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통렬한 비판적 시각을 뮤지컬적 화법과 미감으로 풀어낸 '웃는 남자'가 네 번째 시즌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작품은 17세기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이들을 납치해 기형적인 괴물로 만들고 귀족의 놀잇감으로 쓰는 콤프라치코스가 악명을 떨치던 때. 입이 찢긴 그윈플렌은 떠돌이 약장수 우르수스의 손에 키워지게 되고, 이후 자기 삶을 유희로 삼아 유랑 극단에서 광대로 일한다.

'영원한 미소'를 갖게 된 그윈플렌에게 귀족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귀족 세계를 향한 비판과 풍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유혹하는 조시아나 여공작이 나타나 마음을 흔들었다. 아니, 웬걸.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하룻밤 사이에 귀족으로 신분 상승까지 한다.
뮤지컬 '웃는 남자'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제공
뮤지컬 '웃는 남자'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웃는 남자'는 1막과 2막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그윈플렌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다채로운 전개를 만들어냈다. 1막에서는 시대상과 그윈플렌의 개인사, 인물들 간의 관계성을 적절히 버무려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눈이 보이지 않는 데아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오며 깊은 사랑을 쌓아온 과정, 가난 속에서도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는 유랑 극단 가족들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풀어낸다. 이는 반전된 2막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준다.

웅장한 무대를 빼곡하게 채운 섬세한 연출은 작품에 매료되는 가장 강력한 지점이다. 프로시니엄(객석과 무대를 분리하는 액자형 아치) 안쪽으로 겹겹이 세트를 세워 입체감과 규모감을 극대화했다. 시작부터 그윈플렌의 입을 형상화한 세트가 열리며 거센 파도가 치는 장면이 실감 나게 눈 앞에 펼쳐진다. 그윈플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유랑 극단의 극중극 장면,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실제 물을 튀기며 발을 구르는 빨래터 장면까지 시선을 끄는 요소가 차고 넘친다.

'웃는 남자'는 브로드웨이 출신 연출가 로버트 요한슨이 2012년 '황태자 루돌프' 초연 개막 후 뉴욕으로 돌아가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본 프랑스 영화 '웃는 남자'에서 영감을 받아 출발했다. 제작 기간 5년, 총 175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초대형 프로젝트에 녹아든 고민의 크기를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
뮤지컬 '웃는 남자'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제공
무대 예술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앞서 언급된 그웬플렌이 의회에서 '그 눈을 떠'를 부르는 장면이다.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진 의회의 모습으로 신분 사회가 주는 위압감을 임팩트 있게 이미지화했다. 차가운 현실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그윈플렌이 데아를 품에 안고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곳으로 멀리 떠나는 마지막 장면 역시 긴 여운을 남긴다.

음악은 작품의 핵심이다. '지킬앤하이드', '마타하리', '시라노' 등을 작업한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부드러운 감성이 '웃는 남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부각한다. 바이올린 솔로가 내내 무대 위에서 함께하며 견고하게 감정선을 이끄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극 말미에 이르러 결말을 더욱 서글프면서도 아름답게 가슴에 꽂히게 하는 요소가 된다.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는 따뜻한 시선, 귀족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 인간의 존엄과 평등에 관한 메시지, 드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도 놓치지 않는 숭고한 사랑의 가치. 그윈플렌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진한 인간애를 지녔다. 작품은 묻는다. '진정 괴물은 누구인가?' 슬프지만 아름답기에 '웃는 남자'는 어른 동화로 불린다.

이번 시즌의 그윈플렌은 박은태, 이석훈, 규현, NCT 도영이 맡았다. '웃는 남자'에 처음 합류한 도영은 그윈플렌의 순수함과 소년미를 탁월하게 연기한다. 팀에서 메인 보컬을 맡고 있는 그는 가창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드러내 호평을 얻고 있다. 커튼콜에서는 마치 콘서트에 온 듯한 우렁찬 함성이 쏟아진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활짝 열며 '제2의 규현'을 예감케 한다.

공연은 오는 3월 9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