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가 만든 2027년 점자달력. 카카오 제공
카카오가 만든 2027년 점자달력. 카카오 제공
1999년 말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27층.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실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시각장애인이 손으로 만지며 읽을 수 있는 달력을 큰 기업이 만들어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김 회장은 직원들에게 “시각장애인도 새해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자”며 점자달력 제작을 주문했다. 2000년 5000부로 시작한 한화의 점자달력 사업은 지난해 누적 발행량 100만부를 넘어섰다.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

4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점자달력을 제작하는 기업은 한화와 카카오 단 두 곳이다. 한화가 26년 넘게 ‘나홀로’ 이어온 사업에 카카오가 2025년 합류했다. 디지털 서비스에서 쌓아온 접근성 개선 노력을 오프라인으로 확장하겠다는 취지다.

두 기업은 매년 11월 4일 ‘한글 점자의 날’에 맞춰 다음 해 점자달력을 제작한다. 송암 박두성 선생이 1926년 11월 4일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는 반포 100주년을 맞았다. 한화는 이날 2027년 점자달력 4만부를, 카카오는 8000부를 제작해 배포하고 나섰다. 카카오는 국립서울맹학교에서 달력 전달식도 열었다.
한화가 제작한 '2027년 점자달력'. 한화 제공
한화가 제작한 '2027년 점자달력'. 한화 제공
두 곳의 점자달력은 빳빳한 종이 위에 오돌토돌 점자가 새겨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각기 특장점이 다르다. 주요 대상부터 차이가 있다. 한화는 시각장애인 및 관련 기관·단체·개인을 대상으로 삼아 일상에서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달력에 초점을 맞췄다. 카카오는 시각장애 특수학교·관련 기관 위주로, 캐릭터와 촉각 디자인을 접목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데 공을 들였다.

○춘식이 내세운 카카오

한화 점자달력은 점자와 일반 활자를 함께 표기해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나란히 사용할 수 있다. 날짜와 요일뿐 아니라 음력과 절기 등 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점자로 제공한다. 한화는 이날 열린 ‘한글 점자 반포 100주년 기념식’에서 27년간 점자달력을 제작·배포한 공로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카카오 점자달력의 가장 큰 특징은 ‘춘식이’를 비롯한 인기 캐릭터와 이모티콘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달력 뒷면에 10~20대에게 인기가 높은 이모티콘 캐릭터 12종의 생김새와 감정을 설명하는 대체 텍스트를 점자로 담았다. 캐릭터의 윤곽과 질감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도록 촉각 디자인도 적용했다. ‘생일·시험·중요·여행·병원’ 등 주요 일정을 표시할 수 있는 촉각 스티커도 함께 제공한다.
김혜일 카카오 디지털접근성책임자(DAO·오른쪽)가 4일 국립서울맹학교에서 정은영 국립서울맹학교 교장에게 '2027 카카오 점자달력'을 전달하고 있다. 카카오 제공
김혜일 카카오 디지털접근성책임자(DAO·오른쪽)가 4일 국립서울맹학교에서 정은영 국립서울맹학교 교장에게 '2027 카카오 점자달력'을 전달하고 있다. 카카오 제공
카카오는 제작한 8000부 가운데 500부를 온라인에서 한정 판매한다.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큰 글씨가 필요한 고령층에게도 유용하다는 반응을 반영했다. 판매액 전액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부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전시 사업에 지원할 계획이다. 중증 시각장애인인 김혜일 카카오 디지털접근성책임자(DAO)는 “시각장애인도 캐릭터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며 감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사회공헌이 단순 물품 기부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점자달력은 시각장애인이 일정을 주체적으로 관리하도록 돕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