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공급계약(LTA)이 전자업계의 새로운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급증한 결과다. 메모리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빅테크들이 장기계약을 선호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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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주요 고객사 10곳과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메모리 LTA를 맺었다. 또다른 10개사와 LTA를 협의 중이다. 글로벌 빅테크가 잇달아 삼성전자에 5년 치 이상 반도체를 요청한 결과다. 이 같은 현상은 LTA 트렌드는 반도체를 넘어 인공지능(AI) 부품산업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AI 부품산업이 단기 거래에서 수주 중심으로 지형 구조가 변한다는 분석이다.

◇‘트렌드’로 자리 잡은 LTA

LTA 체결에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은 메모리 업계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내년 메모리 생산량 중 약 80%는 납품처가 이미 확정됐다. 삼성전자와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빅테크는 남은 20% 정도의 생산 물량을 두고 치열한 협상을 이어가야 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콘퍼런스콜에서 “LTA 물량 비중을 2030년까지 생산능력 대비 60~70%로 높이겠다는 당사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다 있다”며 “일부 고객과는 추가 연장 구간 협상이 완료 단계에 있고, 연장 구간 수요가 당초 예상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도 상황은 비슷하다. SK하이닉스는 3분기에 빅테크 등 14개 주요 고객사와 LTA를 체결했다. 내년과 2028년 전체 생산능력의 50% 이상에 해당한다. 회사 관계자는 “2029년까지 3년 동안 D램과 HBM 물량은 사실상 모두 솔드아웃(판매 완료)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마이크론이 LTA 성격의 전략적 고객계약(SCA)을 체결한 횟수는 지난 2분기 16건에서 3분기 26건으로 늘었다. 낸드플래시 제조사인 샌디스크도 빅테크 등 8곳과 LTA를 맺었다.

LTA 트렌드는 메모리에 국한하지 않고 AI 인프라 부품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반도체 패키지 기판인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 테스트소켓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전기는 최근 글로벌 빅테크와 8793억원 규모의 MLCC LTA 체결을 맺었다. 올해 들어서만 여덟 번째 맺는 LTA다. 고객사 50여곳과 MLCC LTA를 체결하거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누적 수주 규모는 5조18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LG이노텍도 FC-BGA 공급을 위해 빅테크와 LTA 협상을 하고 있다.

◇전력 인프라, 냉각장치로 확산

전력 인프라, 냉각장치 부문에서도 LTA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전력기기는 대량의 전력을 쓰는 AI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 꼭 필요하고, 냉각장치는 센터 내 발열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된다. LS전선은 메타, 구글 등 미국 빅테크와 5년 단위 버스덕트 LTA를 맺었다. HD현대일렉트릭도 데이터센터용 변압기 LTA를 추진 중이다. LG전자는 미국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기업 에어와 5조원 규모 칠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LG전자의 AI 데이터센터 관련 수주 금액은 3조원을 넘겼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엔 빅테크가 불리한 조건도 받아들일 정도로 물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LTA가 보편화한 것은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빅테크와 설비투자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공급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및 부품 거래는 분기 단위 계약 혹은 시가 계약으로 체결하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 이 때문에 공급사인 반도체 제조회사는 향후 가격과 수요를 예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글로벌 빅테크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를 늘리면서 이 같은 관행이 바뀌었다. 메모리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게 빅테크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메모리를 제때 확보해 AI 데이터센터를 구동해야 투자금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붐 꺾일 가능성 대비해야

LTA가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시장 주도권은 완전히 공급사로 기울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공급사가 생산능력을 급격하게 키우지 못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메모리는 통상 5년이 기본 계약 기간이 됐다. 계약 구속력을 높이기 위해 20~25% 수준의 거액 선수금이 오가거나 고객사가 물량을 계약대로 사가지 않아도 대금을 내야 하는 고강도 조건이 기본 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공급사는 선수금을 대규모 팹을 건설하는 자금으로 쓰기도 한다.

다만 LTA가 모든 리스크를 해소하는 건 아니라는 목소리도 있다. 반도체 시황이 급격하게 꺾이면 고객사가 위약금을 감수하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때 LTA를 믿고 대규모 설비투자를 단행한 부품사도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최우영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메모리 불황이 불어닥쳐 고객사가 재협상을 요구하면 기존 조건을 완화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원종환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