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신용도가 낮은 기업의 자금 조달 시장이 먼저 흔들리고 있다. 투기 등급 회사채 가운데 최하위권인 CCC급 채권 수익률이 연 21%를 넘어선 데 이어 기업 대출 시장에서도 부실 우려가 번진다. 프랑스 등 주요 국가에서 재정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취약 기업이 대거 도산하는 기업발 위기가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급등하는 회사채 금리

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CCC등급 회사채 수익률(금리)은 연초 연 16%에서 최근 연 21% 이상으로 뛰었다. 최근 미국도 연 18%까지 올랐다. 채권 가격이 급락해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수익률이 치솟은 것이다. 미국 대형 헤지펀드의 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완전한 유혈 사태”라며 “모두가 다음 폭발에 휘말릴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유럽 '정크본드 쇼크'…재정위기 앞서 기업금융 위기 덮치나
같은 정크본드에서도 금리 상승 폭 격차는 컸다. 글로벌 금융 리서치 업체 아란카에 따르면 올해 초 대비 9월 기준 유로화 표시 회사채의 가산금리 확대 폭은 CCC급 2.32%포인트, B급 0.58%포인트, BB급 0.14%포인트였다. 유로화 표시 국채의 만기별 평균 금리를 기준으로 한 가산금리다. 고위험 기업에 투자자의 불신이 집중되고 있다는 뜻이다.

고위험 기업의 회사채 만기가 속속 돌아오는 것도 문제다. 미국 자산운용사 야누스헨더슨이 지난달 내놓은 분석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유로화 투자부적격 등급 회사채 시장에서 CCC+ 이하 채권의 55%가 3년 안에 만기를 맞는다. 야누스헨더슨은 “만기 집중은 지급 불능 위험을 현실화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신규 조달 자금 대부분은 기존 빚을 갚는 데 쓰이고 있다. 유럽금융시장협회(AFME)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유로화 투자부적격 등급 회사채(하이일드채) 발행액 504억유로(약 76조원) 중 60%가 차환용이었다. 회사채 발행 시장이 위축되면 신규 투자뿐 아니라 만기 상환까지 차질을 빚어 도산에 이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유럽 재정위기가 촉발

금융권도 이 같은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않다. 피치의 지난달 발표에 따르면 유럽 하이일드채권의 최근 12개월 부도율은 8월 2.3%에서 9월 2.6%로 상승했다. 피치는 연말 하이일드채 부도율이 3.75~4.25%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최근 유럽 기업채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힘든 이유는 복합적이다. 유럽 국가 재정에 대한 불신이 기업 금융 부담을 키웠다. 피치는 지난달 프랑스 국가신용등급을 A+로 유지하며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달 22일 장중 연 5.1415%까지 올라 2002년 7월 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보통 기업의 조달 금리는 만기에 맞는 국채 등 기준금리에 개별 기업의 신용위험을 더해 정해진다. 국채 금리가 높아지고 재정 불안으로 금융시장 전반의 위험 회피가 강해지면 취약 기업이 받는 압박은 커지게 마련이다.

◇자산 옮겨 자금 조달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도 일부 기업에 부담이 되고 있다. 야누스헨더슨은 “AI가 소프트웨어 개발 진입장벽을 낮춰 투자부적격 등급 소프트웨어 기업의 미래 현금흐름을 위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스페이스X 스타링크 등 위성 인터넷도 기존 통신 사업의 경쟁 구도를 바꿀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에너지 충격은 회사채 수요를 늘렸다. 필립 레인 유럽중앙은행(ECB) 집행이사는 “에너지 가격 급등은 건전한 기업에도 즉각적인 현금흐름 압박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일부 기업은 자금 조달을 위해 기업 구조까지 바꾸고 있다. 지난 7월 5억5000만파운드를 조달한 영국 고급차 제조사 애스턴마틴은 브랜드와 기술 등 핵심 지식재산권을 기존 채권자들이 담보로 잡을 수 없는 자회사로 옮겼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