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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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1600조원 규모 ‘3대 메가프로젝트(반도체·인공지능 데이터센터·피지컬 AI)’가 단순 설비 증설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는 국책연구기관과 학계의 경고가 나왔다. 국산 칩을 사줄 수요처를 묶어내지 못하고 제조 데이터 주권과 기업의 AI 활용 역량을 키우지는 데 실패한다면 천문학적 지금만 투입한 뒤 글로벌 빅테크의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일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가 서울 수하동 페럼타워에서 개최한 ‘3대 메가프로젝트: 국가 성장 플랫폼이 되기 위한 과제’ 공개포럼에서는 정부의 초거대 산업 구상을 실질적인 성장으로 연결하기 위한 보완책이 집중 논의됐다.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개회사에서 “3대 메가프로젝트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이후 우리 경제와 산업의 틀을 바꾸는 가장 큰 도전”이라면서도 “지금까지 투자 규모와 팹(반도체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에만 논의가 쏠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열린 지금 우리에겐 낭비할 시간이 없다”며 “시스템반도체·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 육성과 현장 장인의 제조 데이터 권리 보상, 오랫동안 지체된 송전망 등 인프라 병목을 타개할 협업과 속도전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기조발표에 나선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반도체 초호황이 있기 전까지 '0%대 추락' 이라는 진단이 나왔던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지방 소멸을 동시에 돌파할 승부수로 ‘M·E·G·A(결집·참여·창출·확대) 성장 플랫폼’을 제시했다.

김 장관은 “AI 혁명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던 규범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약육강식·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국가의 흥망성쇠가 갈리는 기로에 섰다”며 “과거 거대 투자가 모두 수도권에 집중됐던 것과 달리 전 국토에 투입되는 이번 프로젝트는 저성장 흐름을 끊고 지역 균형발전을 이룰 유일한 돌파구”라고 말했다.

김 장관은 특히 이번 투자의 파괴력과 정부의 속도전 의지를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산업의 분기점이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가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2.4%,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 흐름을 바꾼 미국 뉴딜 정책이 GDP의 40% 수준이었는데, 1600조원 플러스 알파(+α)에 해당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는 우리 GDP의 60%에 육박한다”며 “솔직히 이름은 ‘메가(Mega)’인데 성과는 ‘미니(Mini)’가 되면 어떡하냐는 걱정이 들 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통상 5년 걸리는 반도체 팹(공장) 가동을 전력·용수 선제 지원과 인허가 일괄 처리, 초광역특구법 제정으로 2년 앞당기면 팹 1기당 50조원의 매출을 더 올릴 수 있다”며 “이는 광주·전남 지역내총생산(GRDP·약 150조원)의 3분의 1을 단숨에 창출하는 시너지로, 정부가 속도전과 진격전에 사활을 거는 이유”라고 역설했다. 또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길이 아니다 싶을 땐 과감히 방향을 틀 수 있는 전환 속도와 모든 경제주체의 협업이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도체 쏠림 우려 "美日 반도체 협정 잊었나"

발표자로 나선 이준 산업연구원 전략산업연구센터장은 메모리 반도체 호황에 취해 있는 한국 산업계의 구조적 취약점을 정조준했다. 그는 지나 러몬도 전 미국 상무장관이 반도체·AI 투자를 냉전 시대 우주 경쟁에 이은 ‘두 번째 내셔널 콜(국가적 소명)’로 규정한 점을 언급하며 “반도체(주가)는 주 5일 내내 국민을 밤낮으로 웃고 울게 하는 드라마 같은 산업이 됐지만, 한순간도 멈추거나 중간에 내릴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센터장은 “SK하이닉스가 분기당 100조원을 벌어들이고 연간 80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는 반면 인텔은 주가가 30% 폭락하는 등 한국이 전대미문의 메모리 초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메모리가 너무 큰 나무라 그 밑에 짙은 그늘이 져 있다”고 꼬집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비메모리(시스템반도체)에선 한국의 존재감이 미미하고, 메가프로젝트의 반도체 민간투자 881조원마저 서남권 메모리 팹 증설에 쏠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압도적인 메모리 점유율이 미국의 통상 보복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이 센터장은 “한국과 미국의 메모리 기술 격차는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마이크론처럼 공장을 빨리 짓는 쪽이 수요를 가져가는 판”이라며 “중국 역시 막대한 보조금으로 범용·모바일 D램을 밀어붙이며 칩 부족에 시달리는 애플과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메모리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경제안보 리스크를 자극한다”며 “1980년대 메모리 점유율 80%를 호령하던 일본이 플라자 합의 및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메모리 기반을 통째로 잃은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원천 특허와 장비를 쥔 미국이 자국 기업 육성책에 통상 압박을 결합하면 한국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서남권에 메가 팹 네 곳을 짓는 데서 멈추면 단순 메모리 수출 사업에 그친다”며 “2019년 시스템반도체 전략이 일본 수출규제와 ‘수요처 부재’로 좌초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550조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와 피지컬 AI라는 거대한 내수 시장이 열리는 만큼 ‘메가 팹’을 ‘메가 생태계’로 확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를 위한 4대 정책 브릿지로 △정부가 용수·전력을 몰아주는 만큼 대기업에 국산 칩 채택 등 생태계 기여 의무를 지우는 ‘K-칩스 딜’ △4대 핵심 제품군 사업화 실적을 전담할 ‘빅4 차르’ △소부장·후공정·미들테크 파운드리를 묶는 ‘한국형 반도체 혁신 허브(K-IMEC & K-파운드리)’ △금융이 아닌 산업계가 투자 대상을 고르는 ‘산업금융플랫폼’ 및 반도체 산업상생 공제조합 설립 등을 제안했다.

"엔비디아가 노리는 건 K장인 손끝"

다음 발표에 나선 박민원 국립창원대 총장은 글로벌 빅테크에 국내 제조 현장의 핵심 노하우를 뺏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의 경쟁국은 현실적으로 철도, 방산, 항공, 자동차 전 부문에서 포트폴리오가 겹치는 프랑스와 독일”이라며 “코로나19 때 관광 대국 프랑스가 무너졌듯 관광은 영원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독일·프랑스가 주춤하는 지금 제조업 비중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메가프로젝트에 성공해야 2040년 GDP 3조달러, 국민소득 6만달러의 기적이 가능하다”고 운을 뗐다.

박 총장은 3대 메가프로젝트 중 피지컬 AI의 성패를 가를 핵심 자산으로 산업단지에 남아 있는 70~80대 숙련 장인들의 ‘암묵지(문서화되지 않은 노하우)’를 꼽았다. 그는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등 해외 빅테크들이 왜 한국 제조 현장에 깊숙이 들어와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그들이 진짜 가져가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장인들의 숙련 데이터와 공정 조건이자, 불량 원인 등 현장 노하우”라고 지적했다. 중국이 공공 로봇 훈련시설을 지어 1100만건의 실물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상황에서, 한국 공장의 데이터가 해외 빅테크의 AI 학습 자산으로만 빨려 들어가면 국내 제조업의 주도권은 완전히 상실된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박 총장은 숙련 데이터를 기업의 자산으로 명확히 정의하고 계약 종료 시 데이터 회수·삭제 조건을 사전에 못 박는 ‘제조 데이터 활용권’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또 “협동로봇과 휴머노이드 시대엔 로봇도 사람처럼 철저히 교육해야 하는데, 테슬라·폭스바겐·BMW와 달리 국내 중소·중견기업은 개념조차 부족하고 정부 사업은 보여주기식 ‘시연’에만 그쳐 현장 신뢰도가 낮다”고 꼬집었다. 기초 학습부터 실증공장, 무인공장까지 거치는 ‘반복적 실증’이 필수이며 실제 창원 산단 스마트팩토리 도입 기업들이 철저한 현장 실증을 거쳐 매출을 38조원에서 70조원으로 두 배로 키운 사례를 제시했다.

박 총장은 “LG전자가 냉장고·에어컨 세계 1위인 것은 컴프레서를 직접 만들기 때문이고, K-전차와 자주포가 각광받는 것도 독일제에 의존하던 구동 엔진과 대포를 국산화했기 때문”이라며 “로봇 관절 역할을 하는 액추에이터와 감속기, 센서, 제어기를 AI 반도체급 국가 전략부품으로 지정해 국산화하고, 지역 대학·숙련자·청년 창업을 묶는 공동 실증 단위 ‘다크셀’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AI수요 못 만들면 데이터센터 빈집될 판"

정병선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메가프로젝트에 연산능력을 만들고(반도체) 나르는(데이터센터) 하드웨어 투자만 있을 뿐, 이를 산업 현장의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지능화’ 단계가 통째로 비어 있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세계 AI 판도는 ‘말하는 AI’에서 스스로 도구를 끌어와 목표를 달성하는 ‘일하는 AI(AI 에이전트)’로 급변하고 있다”며 “AI 에이전트가 혼자 일하는 시간이 7개월마다 두 배씩 늘어나 최신 모델은 16시간 연속 스스로 코드를 수정하고 PC를 조작하며, 글로벌 대기업의 업무 도입률과 소프트웨어 AI 탑재율은 40%를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개인의 AI 사용률만 세계 12위일 뿐, 50인 이상 기업의 AI 도입률은 9.2%, AI 에이전트를 전사에 내재화한 기업은 3.7%에 불과하다. 기업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다 보니 데이터센터 건립 계획도 공허하다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정부가 2035년까지 1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고 했지만, 장기 계약 등으로 확정된 수요는 전체의 12.5%(약 2.5GW)에 불과하다”며 “국내 수요를 폭발시키지 못하면 막대한 전력을 끌어와 지어놓고도 거대한 빈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연산능력을 실제 생산성으로 바꾸기 위한 해법으로 “보안 장치를 갖춘 해외 오픈웨이트(설계값 공개) AI모델을 기업 내부 서버로 먼저 보급해 쓰게 한 뒤 국산 모델로 단계적으로 교체하는 ‘브리지 전략’과 ‘AX 에이전트 성공사례 1000개’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 수요부터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데이터센터는 1단계(2029년 8.4GW)를 확실한 수요 중심으로 짓고, 2단계(2035년 10GW 추가)는 앵커 고객과 전력망 연결이 확보된 사업부터 단계적으로 승인하되, 일정 기간 내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부지와 전력 배정을 과감히 회수하는 집행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제언했다.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을 제정해 특례 연산을 중소기업·공공기관에 할당하고, 단순 보유량이 아니라 실제 활용률과 국산 신경망처리장치(NPU) 탑재 비중으로 ‘국가 총지능’을 관리해야 한다는 제안도 덧붙였다.

특구법 입법, 상시 점검전략 등 쓴소리도

이근 중앙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좌장을 맡은 패널토론에서도 현장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 제언이 쏟아졌다. 박건수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승자독식 구조인 반도체 시장에선 발표된 투자 총액보다 실제 착공과 팹 가동, 국내 공급망 채택이 적기에 이뤄지는지가 생사를 가른다”며 서남권(메모리)·충청권(첨단 패키징)·대경 및 동남권(소부장) 거점 연계와 연구개발(R&D) 인력의 근로시간 특례를 담은 ‘초광역권전략산업특구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했다.

공경철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피지컬 AI는 휴머노이드 하나가 아니라 농업·인명구조 등 다양한 로봇을 품는 생태계가 핵심”이라며 “두뇌(AI 모델)는 언제든 교체할 수 있지만 몸(액추에이터·제어기)과 그 몸이 현장에서 측정한 물리 데이터(힘·촉각)는 대체 불가능한 국가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액추에이터·제어기·AI 모델 간 공통 인터페이스의 국가 규격화와 의료·재활 분야에 인허가 신속 심사 등을 묶은 ‘피지컬 AI 의료·돌봄 트랙’ 신설을 제안했다.

윤대균 아주대 인공지능연구원장은 “18.4GW 데이터센터 목표는 국내 수요가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 점유율 25% 목표에서 도출된 수치”라며 “기가와트(GW)급 시설을 해외 임차인이 자기 기술로 운영하면 대규모 운영 노하우만 해외 클라우드 기업에 뺏기는 만큼, 국민성장펀드·전력 지원을 연산 선구매와 연계해 국산 기술 운영을 의무화하고 토큰 처리량·가동률 등 활용 지표를 함께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서인 한양대 ERICA 글로벌문화통상학부 부교수는 “과거 시스템반도체 전략이 왜 실패했는지 냉정한 사전 평가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며 “대만·일본·독일·네덜란드 등 경쟁국 대비 우리 정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글로벌 관점에서 재점검하고, 미국의 제조업 리쇼어링에 맞선 한국형 ‘사이언스 리쇼어링’ 추진과 함께 사업 집행의 단계화 및 중단 조건(출구전략) 등 정교한 점검 장치를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