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합법도 불법도 아닌 스테이블코인
올해 1~8월 전 세계에서 기업 간 대금 지급과 해외 송금 등 실제 결제에 활용된 스테이블코인 규모가 최소 4010억달러(약 540조원)에 달했다고 한다. 국내 수출입 기업들 사이에서도 테더(USDT), 유에스디코인(USDC) 같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무역 결제에 활용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대구본부세관은 지난해 10월 한국과 베트남 간 9200억원대 불법 스테이블코인 환치기 조직을 적발했다. 그런데 의뢰인 명단에 정상적인 수출입 업체가 대거 포함됐다. 국내 기업이 수출대금을 스테이블코인으로 받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현행법 어디에도 ‘스테이블코인으로 무역대금을 받지 말라’는 금지 조항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은 꽉 막혀 있다. 그러니 평범한 기업까지 음성적인 뒷골목으로 내몰리는 현실이다.

국내 정상적인 수출기업은 사실상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할 수 없다. 해외 바이어에게 코인을 받아도 신고할 서식이 없고, 원화로 바꾸려고 해도 은행에서 법인 실명 계좌 개설을 거절당한다. 관세 신고를 하려고 해도 적합한 결제 코드조차 없다. 법이 아니라 관행이 결제를 가로막고 있어서다. 은행으로선 계좌를 열어줬다가 자금세탁 사고가 터지면 중징계를 받지만, 계좌 개설을 거부하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결제를 회색지대에 방치해 혼란을 야기하는 건 정부의 책임 방기나 다름없다. 거창한 입법이 필요한 사안도 아니다. 법인 계좌 개설은 금융당국의 명확한 지침 하나면 족하다. 신고 서식과 세금 증빙은 관계 부처의 고시 개정으로 충분하다. 관세 코드는 관세청 내부 행정 결정만으로 신설할 수 있다.

오는 12월 3일 개정 외국환거래법 시행을 앞두고 이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개정법은 국경 간 가상자산 이전 업자를 등록시키고 외환전산망에 편입해 해외 이동 감시망을 촘촘히 옭아매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스테이블코인을 무역대금 결제에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는 정리하지 않았다. 기존 ‘지급수단’과 ‘대외지급수단’ 정의를 그대로 둔 채 시행하는 탓에 스테이블코인은 여전히 제도권 밖에 방치된 미아 신세다. 합법적으로 쓸 길은 열어주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감시할 길부터 닦아 놓은 셈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무조건적인 허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금세탁, 탈세, 외화 유출 등의 위험은 엄중하다. 그럼에도 스테이블코인으로 물건값을 내는 실험이 전 세계 백화점과 공항 면세점 등 다양한 오프라인 유통채널로 확산하고 있다. 금융시장에선 수년 내 스테이블코인이 국경을 넘어 돈을 보내는 보편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2025년 명목상 스테이블코인 거래액 35조달러 가운데 실제 정상 지급에 사용된 것은 3900억달러 선에 그쳤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역시 스테이블코인의 화폐 기능에 회의적이다.

가까운 일본의 해법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은 스테이블코인을 기존 틀에 억지로 꿰맞추지 않고 별도로 정의해 외환 보고 체계와 접목했다. 일정액 이상 거래는 사후 보고하도록 해 기업의 결제는 열어 주되, 당국의 감독권은 유지했다. 일본은 ‘규제와 이용 경로’를 함께 설계했고, 한국은 ‘감시와 처벌 장치’만 먼저 만들었다.

더 이상 팔짱만 낀 채 감시만 하지 말고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할 때다. 허용한다면 법을 지키면서 투명하게 쓸 길을 터줘야 하고, 금지할 것이라면 명확한 근거와 범위를 정해야 한다. 허용도 금지도 하지 않은 채 회색지대에 방치하는 것은 행정의 태만이요, 무책임이다. 스테이블코인은 합법인가, 불법인가. 이제 정부가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