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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디저트엔 포르투갈의 달콤한 유산이 숨겨져 있다 [신예희의 나홀로 한입여행]
두 나라의 달달한 만남
그렇게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구경하는데, 먼저 와서 몇 개 구매한 손님이 그중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길래 나도 모르게 꽥 소리쳤다. 미쳤나 봐, 그걸 왜 먹어? 알고 보니, 수백 년 전통의 뼈대 있는 전통 과자라는 거다. 이름은 룩춥(ลูกชุบ). 무려 17세기 아유타야 왕국 시대에 등장했다나.
그런데 룩춥은 맛보다는 유래가 훨씬 흥미롭다. 뜬금없게도 포르투갈에서 물 건너온 디저트니까. 16세기에 말레이반도의 믈라카를 일부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은 곧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과 외교, 경제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태국 아유타야 왕국과도 통상조약을 맺고 자유롭게 거주하며 무역할 권리를 얻어 포르투갈인의 마을이 생겼을 정도다. 자연스레 혼혈 인구가 증가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중 한 명이다.
17세기 중반에 태어난 포르투갈과 인도, 일본 혼혈 여성 마리아 구요마르 데 피냐(Maria Guyomar de Pinha). 뛰어난 실력으로 아유타야 왕실의 요리사가 되어 포르투갈의 전통 디저트 기법을 두루 도입한 장본인이다. 심지어 주방 총책임자로 승진해 종신 근무를 했다니 어지간히 실력이 출중했나 보다.
그렇게 개발한 대표적인 음식이 룩춥이다. 포르투갈에선 아몬드 가루에 설탕과 달걀흰자를 섞어 꾸덕꾸덕하게 반죽해선 과일이나 동물 모양으로 빚어서 달콤한 과자를 만들어 먹는다. 요걸 마사팡(Massapão)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마지팬(Marzipan)으로 더 잘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태국에서 아몬드를 구할 방법이 없으니 이런저런 궁리 끝에 녹두로 대체하고, 코코넛 밀크까지 듬뿍 넣어 한천 젤리로 코팅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름도 정해졌다. 룩춥의 룹은 자그마한 덩어리를, 춥은 겉을 감싼다는 의미다. 원래는 은은한 파스텔 빛깔이던 것도 태국 특유의 예술 감각이 더해져 아주 진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변했다.
마리아 주방장의 또 다른 야심작은 룩춥보다 좀 더 달고 고소한데, 내 입에는 이쪽이 훨씬 맛있다. 이름하여 포이통(ฝอยทอง). 포이는 실, 통은 황금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의 생김새다. 이 진한 황금색은 노른자에서 온 건데, 무려 오리알의 노른자다. 달걀보다 지방 함량이 높고 수분량은 적어서 훨씬 끈적하고 단단하며 색도 진하다. 하지만 냄새가 살짝 강한 편이라 달걀과 오리알을 섞어서 만드는 가게도 많다.
포이통은 편의점의 냉장 디저트 코너에도 있을 정도로 흔한 간식이지만, 이왕이면 만드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먹으면 왠지 몇 배는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나처럼 먹기 위해 여행을 가는 사람에겐 방콕의 올드 시암 플라자(The Old Siam Plaza)를 강력히 추천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쇼핑몰로 차이나타운인 야오와랏 지역과 아주 가깝다. 쇼핑몰 1층이 몽땅 태국 전통 간식 코너라, 이 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단 음식은 이 안에 다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2층은 전통 의상과 장신구 전문점이라 역시 흥미진진하다.
이걸 끝도 없이 척척 만드는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냄비 앞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게 된다. 남이 하는 건 쉬워 보이는 법이라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도 잠깐 들지만, 시럽은 버글버글 끓는 데다 노른자는 줄줄 새어 나오니 어지간히 숙달된 기술자가 아니면 화상 입기 일쑤일 거다.
맛이 궁금하실 텐데, 달걀노른자와 설탕을 듬뿍 넣어 진하고 달콤한 카스텔라를 만든 다음 거기서 실을 뽑아내면 포이통이 될 것 같다고 답하겠다. 이상한 설명이지만 더 이상의 표현이 어렵다. 분명 아는 맛인데 고급스럽고, 진하고, 달고, 향기롭다. 은은한 차 한잔을 곁들여 살금살금 야금야금 맛보며 포이통의 매력을 느껴보자. 이 아름다운 황금 실타래엔 어르신의 무병장수와 부부의 백년해로를 바라는 의미가 담겼다. 태국의 제례와 결혼식, 생일은 물론이고 집들이나 승진 축하 파티 등 좋은 날엔 꼭 포이통을 상에 올린다.
마리아 주방장은 이 달걀 크림을 태국의 상황에 맞게 살짝 변형했다. 당시 달걀보다 오히려 흔하던 오리알 노른자와 재스민꽃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설탕 시럽으로 포이통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황금색 과자를 만든 것이다. 신선한 재스민꽃을 생수에 담가서 밤새 놔두었다가 꽃잎을 걸러낸 후, 이 물과 설탕을 1대 1로 섞어 약한 불에서 설탕이 녹을 때까지 젓지 않고 살살 끓이면 재스민 향의 시럽이 완성된다. 요게 들어가야 오리알 냄새가 확실히 잡힌다.
좀 더 화사한 맛을 내려면 판단 잎을 짓이기거나 갈아서 짜낸 즙을 좀 섞기도 한다. 판단(Pandan)은 진한 초록색의 길쭉하고 빳빳한 식물인데, 묵직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아시아의 바닐라’라고도 불린다. 사실 바닐라라기보단 고소하고 구수한 누룽지 냄새에 좀 더 가깝긴 하다. 떡, 과자, 빵, 아이스크림, 음료 등 판단이 안 들어가는 데가 없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서 연하거나 진한 초록빛의 디저트를 발견한다면 십중팔구는 판단을 넣은 것이다. 말차가 아니라.
이 세 가지 재료를 큼직한 그릇에 넣어 팜 슈가가 완전히 녹을 때까지 저은 다음, 냄비에 물을 끓여 요 그릇을 위에 올려놓고 쉬지 않고 저어가며 살살 중탕한다. 이게 중요한데, 귀찮다고 그릇을 그냥 불에 올렸다간 달걀이 스크램블처럼 익어버릴 것이다. 20분 넘게 젓는 것을 소홀히 했다간 크림이 바닥에 눌어붙고 뭉쳐버릴 거고. 그 옛날 아유타야의 왕실 주방에선 아마도 막내 직원이 상카야 담당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과장 좀 보태서 핸드볼 공만 한 큼직한 단호박으로 만든 상카야 팍통을 통째로 사서 야금야금 베어 먹다가 결국 앉은 자리에서 끝을 본 적도 있다. 그만 먹어야 한다고 부질없는 혼잣말을 하면서. 포르투갈과 태국의 식문화가 어우러진 마리아 주방장의 역작은 수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렇게 달콤하고, 여전히 이렇게 사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