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춥은 태국식 애프터눈 티 차림에 빠지지 않는다 / 사진. © 신예희
룩춥은 태국식 애프터눈 티 차림에 빠지지 않는다 / 사진. © 신예희
태국을 여행한 적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정체불명의 물체가 있다. 얼핏 보면 알록달록한 과일과 채소 모형 같고, 크기는 5센티미터 남짓하다. 망고와 오렌지, 수박, 바나나, 가지, 고추, 포도 등 종류가 다양하다. 하나같이 아주 화려하고 진한 빛깔에, 표면은 반들반들 광택이 난다. 오래전 방콕의 한 야시장에서 처음 보았을 땐 냉장고 자석인가 했다. 찰흙이나 지점토로 빚어서 물감을 칠한 모양이군. 아니면 미니 사이즈의 비누일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구경하는데, 먼저 와서 몇 개 구매한 손님이 그중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길래 나도 모르게 꽥 소리쳤다. 미쳤나 봐, 그걸 왜 먹어? 알고 보니, 수백 년 전통의 뼈대 있는 전통 과자라는 거다. 이름은 룩춥(ลูกชุบ). 무려 17세기 아유타야 왕국 시대에 등장했다나.
눈에 확 띄는 룩춥 / 사진. © 신예희
눈에 확 띄는 룩춥 / 사진. © 신예희
룩춥은 녹두를 푹 쪄서 으깬 것에 코코넛 밀크를 듬뿍 섞어 기름지고 꾸덕꾸덕한 반죽을 만들어선 식용색소로 다양한 색을 내어 이런저런 모양으로 빚은 달콤한 과자다. 굽거나 튀기지 않고 반죽째로 먹는데, 덥고 습한 기후에도 모양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한천으로 만든 묽은 젤리에 여러 차례 담갔다가 빼어 코팅한다. 그 덕분에 룩춥은 어디서나 눈에 잘 띈다. 특히 야시장 조명 아래에서 유난히 화려하게 반짝거린다. 그에 비해 맛은 좀 슴슴하고 덤덤한 편이다. 아무래도 녹두로 만든 것이라 그렇겠다.

그런데 룩춥은 맛보다는 유래가 훨씬 흥미롭다. 뜬금없게도 포르투갈에서 물 건너온 디저트니까. 16세기에 말레이반도의 믈라카를 일부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은 곧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과 외교, 경제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태국 아유타야 왕국과도 통상조약을 맺고 자유롭게 거주하며 무역할 권리를 얻어 포르투갈인의 마을이 생겼을 정도다. 자연스레 혼혈 인구가 증가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중 한 명이다.

17세기 중반에 태어난 포르투갈과 인도, 일본 혼혈 여성 마리아 구요마르 데 피냐(Maria Guyomar de Pinha). 뛰어난 실력으로 아유타야 왕실의 요리사가 되어 포르투갈의 전통 디저트 기법을 두루 도입한 장본인이다. 심지어 주방 총책임자로 승진해 종신 근무를 했다니 어지간히 실력이 출중했나 보다.

그렇게 개발한 대표적인 음식이 룩춥이다. 포르투갈에선 아몬드 가루에 설탕과 달걀흰자를 섞어 꾸덕꾸덕하게 반죽해선 과일이나 동물 모양으로 빚어서 달콤한 과자를 만들어 먹는다. 요걸 마사팡(Massapão)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마지팬(Marzipan)으로 더 잘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태국에서 아몬드를 구할 방법이 없으니 이런저런 궁리 끝에 녹두로 대체하고, 코코넛 밀크까지 듬뿍 넣어 한천 젤리로 코팅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름도 정해졌다. 룩춥의 룹은 자그마한 덩어리를, 춥은 겉을 감싼다는 의미다. 원래는 은은한 파스텔 빛깔이던 것도 태국 특유의 예술 감각이 더해져 아주 진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변했다.

마리아 주방장의 또 다른 야심작은 룩춥보다 좀 더 달고 고소한데, 내 입에는 이쪽이 훨씬 맛있다. 이름하여 포이통(ฝอยทอง). 포이는 실, 통은 황금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의 생김새다. 이 진한 황금색은 노른자에서 온 건데, 무려 오리알의 노른자다. 달걀보다 지방 함량이 높고 수분량은 적어서 훨씬 끈적하고 단단하며 색도 진하다. 하지만 냄새가 살짝 강한 편이라 달걀과 오리알을 섞어서 만드는 가게도 많다.

포이통은 편의점의 냉장 디저트 코너에도 있을 정도로 흔한 간식이지만, 이왕이면 만드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먹으면 왠지 몇 배는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나처럼 먹기 위해 여행을 가는 사람에겐 방콕의 올드 시암 플라자(The Old Siam Plaza)를 강력히 추천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쇼핑몰로 차이나타운인 야오와랏 지역과 아주 가깝다. 쇼핑몰 1층이 몽땅 태국 전통 간식 코너라, 이 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단 음식은 이 안에 다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2층은 전통 의상과 장신구 전문점이라 역시 흥미진진하다.
휘휘 돌려서 노른자를 가늘게 뽑는다 / 사진. © 신예희
휘휘 돌려서 노른자를 가늘게 뽑는다 / 사진. © 신예희
가지런히 모인 포이통 / 사진. © 신예희
가지런히 모인 포이통 / 사진. © 신예희
신기한 음식을 실컷 구경하다 보면 커다란 금속 냄비에다 묽은 액체를 바글바글 끓이며 뭔가를 조리하는 가게가 눈에 띌 텐데, 거기가 바로 포이통 전문점이다. 재스민꽃 향기가 나는 설탕 시럽을 끓이고, 잘 풀어서 곱게 거른 노른자를 깔때기 비슷한 도구에다 한 국자 담아서 시럽 냄비 위에서 손목 스냅을 이용해 원을 그리며 흔든다. 그러면 깔때기 끝의 작은 구멍을 통해 노른자가 실처럼 줄줄 흘러내려 끓는 시럽 안으로 들어가며 곧바로 익는다. 이때 쉬지 않고 흔들어야 실이 뚝뚝 끊기지 않는다. 몇 초 후에 기다란 쇠막대기로 요 황금색 실을 부드럽게 그러모은 후 판판하게 잘 펴서 식히면 포이통 완성이다.

이걸 끝도 없이 척척 만드는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냄비 앞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게 된다. 남이 하는 건 쉬워 보이는 법이라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도 잠깐 들지만, 시럽은 버글버글 끓는 데다 노른자는 줄줄 새어 나오니 어지간히 숙달된 기술자가 아니면 화상 입기 일쑤일 거다.

맛이 궁금하실 텐데, 달걀노른자와 설탕을 듬뿍 넣어 진하고 달콤한 카스텔라를 만든 다음 거기서 실을 뽑아내면 포이통이 될 것 같다고 답하겠다. 이상한 설명이지만 더 이상의 표현이 어렵다. 분명 아는 맛인데 고급스럽고, 진하고, 달고, 향기롭다. 은은한 차 한잔을 곁들여 살금살금 야금야금 맛보며 포이통의 매력을 느껴보자. 이 아름다운 황금 실타래엔 어르신의 무병장수와 부부의 백년해로를 바라는 의미가 담겼다. 태국의 제례와 결혼식, 생일은 물론이고 집들이나 승진 축하 파티 등 좋은 날엔 꼭 포이통을 상에 올린다.
[좌] 포이통을 듬뿍 얹은 도넛  [우] 카놈 브앙 노점 / 사진. © 신예희
[좌] 포이통을 듬뿍 얹은 도넛 [우] 카놈 브앙 노점 / 사진. © 신예희
그렇게 포이통과 친해지고 나면, 그전에는 보이지 못한 게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여기도 포이통, 저기도 포이통이다. 노점과 야시장 등에서 흔히 파는 얇은 구움과자 카놈 브앙(ขนมเบื้อง)에도, 온갖 케이크와 빵에도 포이통 토핑이 듬뿍 올라간다. 심지어 글로벌 도넛 체인에서도 포이통을 얹은 도넛을 판다. 붕어빵과 호두과자, 단팥빵 등 우리나라에선 온갖 빵·과자에 단팥을 넣는 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포이통과 같은 재료로 만든 다양한 전통 과자류 / 사진. © 신예희
포이통과 같은 재료로 만든 다양한 전통 과자류 / 사진. © 신예희
포이통 역시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다. 오래전 포르투갈 수도원에선 깨끗하게 세탁한 옷에 달걀흰자를 발라 빳빳하게 풀을 먹여 주름을 폈는데, 자연히 노른자가 남아돌아 처치하기가 곤란했단다. 요걸 어떻게 써먹을까 요리조리 궁리한 끝에, 엄청난 양의 설탕을 붓고 하염없이 저어서 샛노란 크림을 만들어선 빵이며 과자에 듬뿍듬뿍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달콤하고 바삭한 에그타르트인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도 그렇게 시작됐다.

마리아 주방장은 이 달걀 크림을 태국의 상황에 맞게 살짝 변형했다. 당시 달걀보다 오히려 흔하던 오리알 노른자와 재스민꽃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설탕 시럽으로 포이통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황금색 과자를 만든 것이다. 신선한 재스민꽃을 생수에 담가서 밤새 놔두었다가 꽃잎을 걸러낸 후, 이 물과 설탕을 1대 1로 섞어 약한 불에서 설탕이 녹을 때까지 젓지 않고 살살 끓이면 재스민 향의 시럽이 완성된다. 요게 들어가야 오리알 냄새가 확실히 잡힌다.

좀 더 화사한 맛을 내려면 판단 잎을 짓이기거나 갈아서 짜낸 즙을 좀 섞기도 한다. 판단(Pandan)은 진한 초록색의 길쭉하고 빳빳한 식물인데, 묵직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아시아의 바닐라’라고도 불린다. 사실 바닐라라기보단 고소하고 구수한 누룽지 냄새에 좀 더 가깝긴 하다. 떡, 과자, 빵, 아이스크림, 음료 등 판단이 안 들어가는 데가 없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서 연하거나 진한 초록빛의 디저트를 발견한다면 십중팔구는 판단을 넣은 것이다. 말차가 아니라.
상카야와 빵을 파는 노점 / 사진. © 신예희
상카야와 빵을 파는 노점 / 사진. © 신예희
그러고 보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껏 느껴지는 특유의 맛과 향이 있다. 재스민꽃과 코코넛 밀크, 판단 잎처럼, 우리나라 음식에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동남아시아 고유의 풍미다. 마리아 주방장의 또 하나의 역작 상카야(สังขยา)도 달걀과 코코넛 밀크, 팜 슈거가 듬뿍 들어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이라, 살짝 찍어서 맛을 보면 ‘태국 맛’이라는 느낌이 온다.

이 세 가지 재료를 큼직한 그릇에 넣어 팜 슈가가 완전히 녹을 때까지 저은 다음, 냄비에 물을 끓여 요 그릇을 위에 올려놓고 쉬지 않고 저어가며 살살 중탕한다. 이게 중요한데, 귀찮다고 그릇을 그냥 불에 올렸다간 달걀이 스크램블처럼 익어버릴 것이다. 20분 넘게 젓는 것을 소홀히 했다간 크림이 바닥에 눌어붙고 뭉쳐버릴 거고. 그 옛날 아유타야의 왕실 주방에선 아마도 막내 직원이 상카야 담당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좌] 찐 식빵과 상카야를 곁들인 태국식 브런치  [우] 초록빛의 판단 상카야를 튀김빵과 함께 먹어보자 / 사진. © 신예희
[좌] 찐 식빵과 상카야를 곁들인 태국식 브런치 [우] 초록빛의 판단 상카야를 튀김빵과 함께 먹어보자 / 사진. © 신예희
이 크림을 부드러운 식빵(일반 식빵을 다시 한번 살짝 찐다)이나 튀김 빵에 곁들이면 참 맛있다. 달고 부드럽고 고소한 게, 우리가 아는 슈크림 맛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기본적인 상카야는 연한 갈색빛인데, 판단 즙을 듬뿍 넣은 초록빛 상카야도 있으니 비교해 보자.
멈출수 없는 마성의 맛 상카야 팍통 / 사진. © 신예희
멈출수 없는 마성의 맛 상카야 팍통 / 사진. © 신예희
그런데 상카야를 제일 맛있게 먹는 방법은, 단호박 뚜껑을 열어 씨앗을 긁어낸 다음 익히지 않은 상카야를 채워서 약한 불에서 한 시간쯤 푹 쪄먹는 것이다. 이걸 상카야 팍통(สังขยาฟักทอง)이라고 한다. 망고 찹쌀밥이나 달콤한 찰떡 등을 파는 노점과 가게에선 으레 상카야 팍통도 함께 팔고 있다. 발견하는 즉시 깊이 생각하지 말고 냅다 사자. 달콤하고 부드럽고 촉촉하게 익은 단호박에 은은하고 향기로운 코코넛 밀크, 진한 달걀, 진득한 팜 슈거 풍미가 어우러져 정말 맛있다. 많이 달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다.

과장 좀 보태서 핸드볼 공만 한 큼직한 단호박으로 만든 상카야 팍통을 통째로 사서 야금야금 베어 먹다가 결국 앉은 자리에서 끝을 본 적도 있다. 그만 먹어야 한다고 부질없는 혼잣말을 하면서. 포르투갈과 태국의 식문화가 어우러진 마리아 주방장의 역작은 수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렇게 달콤하고, 여전히 이렇게 사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