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음악 홍보 행사에 등장한 버버리풍 체크무늬 자동차. 영국 명품 브랜드 버버리는 2000년대 초 특유의 체크무늬가 일부 젊은 층의 하위문화인 ‘차브(Chav)’의 상징으로 유행하면서 고급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StarOpal
200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음악 홍보 행사에 등장한 버버리풍 체크무늬 자동차. 영국 명품 브랜드 버버리는 2000년대 초 특유의 체크무늬가 일부 젊은 층의 하위문화인 ‘차브(Chav)’의 상징으로 유행하면서 고급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StarOpal
스케이트보더들의 사랑을 받던 슈프림은 2010년대 들어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인기가 높아질수록 정작 브랜드를 사랑했던 스케이트보더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면 크록스는 한때 못생긴 신발의 대명사로 통했지만, 2020년대 들어 젊은 층의 패션 아이템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똑같이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인 두 브랜드의 운명은 왜 엇갈렸을까?

기업은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애쓴다. 고객이 늘어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신간 <성장 딜레마>는 새 고객을 얻는 과정에서 기존 고객이 떠나고, 성장을 위한 전략이 오히려 브랜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설을 파고든다.

저자인 애니 윌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와 라이언 해밀턴 에모리대 고이주에타 경영대학원 교수는 브랜드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기업과 고객의 관계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고객과 고객 사이의 관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1994년 뉴욕의 스케이트보드 매장에서 출발한 슈프림은 스케이트보더들에게 단순한 의류 브랜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패션을 좇는 소비자들이 몰려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누구나 슈프림을 입게 되자 스케이트보더들은 브랜드를 통해 드러내던 특별한 정체성이 희미해졌다고 느꼈다. 새로운 고객의 유입이 기존 고객에게는 브랜드의 매력 감소로 이어진 것이다.

크록스는 다른 방식으로 고객층을 넓혔다. 2002년 출시된 크록스는 가볍고 편안하며 세척하기 쉬운 신발이었다. 초기에는 요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 정원사, 의료·서비스업 종사자 등 실용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았다. 독특한 외형 때문에 패션과 거리가 먼 신발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개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에게도 인기를 얻으면서 패션 상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같은 제품을 서로 다른 이유로 선택하는 고객들이 생겨난 것이다.
고객 느는데 단골이 떠난다…브랜드 성장의 역설, 신간 <성장 딜레마>
저자들은 고객을 나이나 성별보다 브랜드에서 얻으려는 가치를 기준으로 나눠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객 집단 간 관계도 네 가지로 구분한다.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상대에게 무관심한 '분리형 커뮤니티', 이용자가 늘수록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연결형 커뮤니티', 한 집단의 선택이 다른 집단의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리더-팔로워 세그먼트', 한쪽의 존재가 다른 쪽의 만족을 떨어뜨리는 '비양립성 세그먼트'다.

작업화로 출발한 팀버랜드는 서로 다른 고객층이 공존하는 사례다. 노동자들이 신던 신발이 힙합 팬들 사이에서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두 집단은 서로의 존재를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반면 스타벅스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오래 머물려는 고객과 모바일로 주문한 커피를 빨리 받아 가려는 고객의 요구가 충돌할 수 있다. 한쪽의 편의를 높이는 일이 다른 쪽의 만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충돌의 양상도 다양하다. 책은 제품이나 서비스 이용 방식을 둘러싼 '기능적 충돌', 브랜드가 상징하는 의미를 둘러싼 '브랜드 이미지 충돌', 브랜드로 표현하던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사용자 정체성 충돌', 신념과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이념적 충돌'로 구분한다.

파타고니아는 브랜드 이미지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다. 환경 보호와 야외 활동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던 이 브랜드는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 직장인들의 옷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새로운 고객층의 유입으로 브랜드가 상징하는 이미지가 달라지면서 기존 고객과의 관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명품 보석 브랜드 티파니도 1990년대 후반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 비교적 저렴한 110달러에 출시한 은팔찌가 10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다. 젊은 고객들이 몰려들며 매출은 늘었지만, 고급 보석 브랜드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세그먼트 관계 관리(SRM)'다. 고객 집단 사이에 울타리를 세워 분리하거나, 다리를 놓아 연결하고, 사다리를 만들어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의 동경을 받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고객 집단의 관계를 분석하는 '세그먼트 호환성 매트릭스'도 제시한다. 모든 고객을 무조건 끌어안기보다 서로 다른 고객의 요구가 양립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기존 고객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고객층을 포기하는 선택도 필요하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