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아리랑'을 노래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핀란드 오케스트라 헬싱키 필하모닉이 펼쳐낸 시벨리우스는 한마디로 차원이 달랐다.

공연의 시작을 연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부터 '교향곡 2번'과 앙코르곡 '핀란디아'까지, 공연의 대부분을 핀란드 대표 작곡가 시벨리우스로 채운 이 악단은 본토 음악을 선곡한 자신감만큼이나 남다른 깊이의 울림을 선사했다.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상임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사진=롯데문화재단, 구본숙 사진작가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상임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사진=롯데문화재단, 구본숙 사진작가
1882년 설립된 헬싱키 필하모닉이 한국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23년 여름부터 이 악단을 이끌고 있는 백발의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는 강물이 거대한 물줄기를 따라 유유히 흘러가듯 크고 절제된 손짓으로 음악을 빚어냈다.

1부의 문을 연 작품은 벨기에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바탕으로 한 동명 모음곡이었다. 사라스테가 "하나의 작은 교향곡"을 염두에 두고 직접 고른 1·2·8·9번 작품이 차례로 이어졌다. 신비로운 여인 멜리장드와 펠레아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슴 먹먹한 선율로 피어오르자 객석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경쾌한 리듬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8번 곡에 이어 마지막 순서인 9번 곡에 이르자 악단의 숨겨왔던 저력이 드러났다. 바이올린을 필두로 한 현악기군의 가장 섬세하고 여린 음색이 오히려 가장 크고 저릿한 파동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무대에 올라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들려줬다. 그는 2015년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와 2022년 시벨리우스 국제 콩쿠르를 석권한 연주자답게 공연 내내 여유로운 호흡으로 악단과 합을 맞췄다. 줄곧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절묘하게 섞인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아이러니한 선율을 매끄럽게 뽑아냈다. 특히 악단의 정교한 피치카토(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연주법) 위에 고음의 독주 바이올린이 더해지는 2악장에선 비단처럼 곱고 우아한 음색으로 관객을 매혹했다.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와 헬싱키 필하모닉이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사진=롯데문화재단, 구본숙 사진작가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와 헬싱키 필하모닉이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사진=롯데문화재단, 구본숙 사진작가
2부로 접어들며 악단은 한층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1902년 시벨리우스 본인이 지휘봉을 잡고 헬싱키 필하모닉이 첫선을 보인 교향곡 2번을 들려줄 차례였다.

1901년 시벨리우스가 이탈리아 북부 휴양지 라팔로에 머물며 완성한 이 작품은 광활한 대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선율 덕에 '시벨리우스의 전원 교향곡'으로 불린다. 이날 연주에서도 장대한 자연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1악장에선 오보에를 중심으로 한 목관악기가 갓 녹아내린 알프스 산맥의 빙하수처럼 맑고 신선한 운율을 흘려보냈고, 2악장에선 바순과 금관부대의 우울하면서도 비장한 선율이 회색빛 북유럽 공기를 불러오는 듯했다.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사진=롯데문화재단, 구본숙 사진작가
지난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사진=롯데문화재단, 구본숙 사진작가
클라이맥스는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연결부에서 터져 나왔다. 시벨리우스 본인은 부인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지배 속에 핀란드 민족의 독립 염원을 그려냈다는 해석이 뒤따랐을 만큼 웅장하고 희망찬 선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라스테의 절제된 손짓을 따라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오고, 그 위로 바이올린과 목관악기의 고고한 선율이 포개지자 온갖 더러움을 떨쳐낸 백학 한 무리가 하늘로 비상하는 듯한 황홀경이 무대 위로 펼쳐졌다.

이날 무대는 악기간 응집력, 정교한 다이내믹과 템포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은 호연이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대하는 단원들의 진심과 애정,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전율로 다가온 무대였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