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의 반사이익과 명품 자본을 등에 업은 파리가 다시 글로벌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 부활의 현장을 아트바젤 파리에서 짚어본다.

FIAC 밀어낸 ‘아트바젤 파리’

10월에 열린 아트바젤 파리(Art Basel Paris)는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대규모 시위 때문에 일정을 이틀 앞두고 조기 폐막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지만, 세계 슈퍼리치들의 ‘그림 쇼핑’을 막지는 못했다. 프랑스 로컬 갤러리 64곳을 포함해 전 세계 41개국에서 온 최정상급 갤러리 211곳이 집결했고, 올해 처음 참가한 갤러리도 32곳이나 됐다.

아트바젤이 세계 최고의 아트페어이긴 하지만, 단순한 비즈니스의 장에 머물지 않고 예술 기관으로서 공공적 역할까지 하려는 점이 특히 눈에 띄었다. 프티 팔레·인권 광장 등 파리의 주요 랜드마크를 활용해 공공미술을 선보였고, 미술사 재조명을 내세우는 ‘프레미스(Premise)’ 섹터는 올해 공간을 더 넓히고 부스도 추가했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에서 열리고 있는 바버라 크루거의 <눈물의 역사(The History of Tears)> 전시 전경. © 안도 다다오 건축연구소, 니네 에 마르카 아키텍트, 아장스 피에르 앙투안 가티에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에서 열리고 있는 바버라 크루거의 <눈물의 역사(The History of Tears)> 전시 전경. © 안도 다다오 건축연구소, 니네 에 마르카 아키텍트, 아장스 피에르 앙투안 가티에
아트바젤 파리 기간에는 세계 각지의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 애호가가 파리로 몰려든다. 주요 미술관이 한 해 가장 공들인 전시를 이 시기에 맞춰 개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중 단연 화제는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의 <리멤버 미(Remember Me)>다. 사진 발명 200주년을 기념해 내년 1월 18일까지 열리며, 전시명은 미국의 세계적 개념미술가 바버라 크루거의 작품에서 따왔다.

전시의 문을 여는 것도 크루거다. 그의 작품들로 구성된 특별 설치전 <눈물의 역사(The History of Tears)>로 웅장하게 시작한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원형 홀(Rotunda)로 유명한데, 이곳의 콘크리트 돔과 곡선 벽면, 바닥 전체가 크루거 특유의 거대한 텍스트로 뒤덮였다. 공간 전체를 몰입감 있는 시각적 언어로 감싼 압도적 스케일이 단숨에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빙 펜(Irving Penn), 레이몽 드파르동(Raymond Depardon) 등 주요 작가들의 별도 전시를 비롯해 80여 명의 작품 700여 점으로 사진의 역사를 밀도 있게 조망한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은 역사적 건축물과 민간 자본이 결합해 파리의 예술 생태계를 역동적으로 바꾼 대표적 공간이다. 파리가 현대미술의 허브로 도약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이곳에서 사진 매체의 200년 역사를 기념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미술 허브로서 파리가 지닌 무게감을 실감하게 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파리는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을 뿐 뉴욕, 런던, 심지어 홍콩에 비해 서도 현대미술의 현장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20세기 초반 세계 미술사를 주도한 파리 특유의 향기가 되살아나며 다시금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부활했다. 1974년에 창설되어 약 5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프랑스의 대표적 로컬 아트페어 ‘피악(FIAC)’의 자리에 2022년 글로벌 브랜드인 ‘아트바젤 파리’가 들어간 것은 파리가 명실상부한 글로벌 현대미술의 허브로 재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럭셔리 브랜드가 세운 ‘현대미술 벨트’

이러한 파리의 르네상스를 이끈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브렉시트 이후 런던이 물류와 세제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이에 파리는 EU 회원국으로서 규제 완화의 이점을 적극 활용했다. 미술품에 대한 부가가치세(VAT)를 낮추고 기업의 예술 후원을 독려하는 법을 마련하는 등 미술 비즈니스 친화 정책을 앞세우며 런던의 시장점유율을 흡수했다. 세계적 메가 갤러리가 앞다퉈 파리에 유럽 본부를 설립하거나 전시 공간을 확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트바젤/UBS 글로벌 아트 마켓 보고서 2026’에 따르면, 2025년 프랑스의 미술 시장 매출은 45억 달러에 달해 전 세계 미술 시장의 8%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44%), 영국(18%), 중국(14%)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로, 금액 기준으로는 EU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다. 미술 시장 전체 매출 규모에서는 여전히 영국이 프랑스를 앞서고 있지만, 프랑스의 점유율은 20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으며 계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다.
'아트바젤 파리 2026’의 필라 코리아스(Pilar Corrias) 갤러리 출품작. 크리스티나 쿼를스(Christina Quarles), ‘크리스털 타운(Crystal Town)’, 2026. © Christina Quarles. Courtesy of the artist, Pilar Corrias, London and Hauser & Wirth
'아트바젤 파리 2026’의 필라 코리아스(Pilar Corrias) 갤러리 출품작. 크리스티나 쿼를스(Christina Quarles), ‘크리스털 타운(Crystal Town)’, 2026. © Christina Quarles. Courtesy of the artist, Pilar Corrias, London and Hauser & Wirth
두 번째 요인은 프랑스 태생 럭셔리 브랜드들의 막강한 자본력이다. 2014년 개관한 루이 비통 재단과 2021년 문을 연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에 이어 까르띠에 재단은 2025년 루브르 박물관 맞은편 팔레 루아얄 광장에 대규모 새 전시 공간을 마련해 자리를 옮겼다. 럭셔리 기업이 후원하는 메가급 민간 미술관들이 파리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막대한 자본력과 탁월한 작품 수집력을 바탕으로 한 이들 민간 미술관은 전통적인 공공 미술관과 경쟁하며 파리 미술계를 수준 높은 산업으로 만들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루브르를 중심으로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까르띠에 재단 등 럭셔리 브랜드가 주도하는 거대한 ‘미술 벨트’가 파리 중심부에 완성되며, 현대미술의 파워를 완전히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런던의 브렉시트가 파리에 안겨준 기회를 폭발적으로 극대화한 주역이 바로 이들 럭셔리 브랜드인 것이다.

이 메가 미술관들이 주목하는 방향도 흥미롭다. 까르띠에 재단은 가나 출신의 현대미술가 이브라힘 마하마(Ibrahim Mahama)에게 미술관 공간 전체를 내준 전시 <수확의 계절(The Harvest Season, Le Temps des Récoltes)>을 내년 2월 28일까지 선보인다. 아프리카의 자생적 문화 현상과 연대를 보여주는 대규모 전시다. 루이 비통 재단은 ‘오픈 스페이스(Open Spac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작가 모하마드 알파라지(Mohammad Alfaraj)의 첫 프랑스 기관 개인전을 열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출신 작가들이 현대미술의 다원화를 이끌고 있는 현주소를 최전선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트바젤 파리 2026’의 세실 파쿠리(Cécile Fakhoury) 갤러리 출품작. 카를-에두아르 케이타(Carl-Édouard Keïta)의 작품 ‘바소리와 고나테(Bassori and Gonaté)’, 2026. © Courtesy of Galerie Cécile Fakhoury
'아트바젤 파리 2026’의 세실 파쿠리(Cécile Fakhoury) 갤러리 출품작. 카를-에두아르 케이타(Carl-Édouard Keïta)의 작품 ‘바소리와 고나테(Bassori and Gonaté)’, 2026. © Courtesy of Galerie Cécile Fakhoury
활기를 완벽히 되찾은 파리는 연중 내내 역동적인 현대미술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내년 4월에 열리는 로컬 아트페어 ‘아트 파리(Art Paris)’는 파리만의 강력한 지역적 정체성과 세계적인 매력을 결합해 전 세계 컬렉터들이 찾아오는 사실상의 글로벌 페어로 자리 잡았다. 매년 11월 그랑 팔레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사진 전문 아트페어 ‘파리 포토(Paris Photo)’ 역시 전 세계 사진 애호가를 파리로 모으는 동력이다. 막강한 문화적 유산, EU 회원국으로서의 이점, 그리고 글로벌 럭셔리 자본의 시너지 덕에 파리는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예술의 도시라는 옛 명성을 되찾았다.

파리=이규현 이앤아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