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해 동안 열번도 더 본 '지젤'인데, 이렇게 재밌긴 정말 오랜만이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빠져나가는 관객 사이에서 들려온 이 한마디가 이번 무대의 모든 것을 설명했다. 13일부터 17일까지 펼쳐진 국립발레단 정기공연 '지젤' 현장에서다.
국립발레단 '지젤' 중 이하연(지젤)과 김기완(알브레히트). ⓒ국립발레단 Photo by YOON6PHOTO
국립발레단 '지젤' 중 이하연(지젤)과 김기완(알브레히트). ⓒ국립발레단 Photo by YOON6PHOTO
발레 애호가들에게 '지젤'은 너무나 익숙한 레퍼토리다. 시골 소녀 지젤이 신분을 속인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고 배신을 당한 뒤 귀신이 돼 그를 용서한다는, 어찌보면 단선적인 내용이다. 서사는 물론 장면 하나, 음악 한구절까지 눈과 귀에 익은 이 작품이 과연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과거의 지젤을 마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올해 국립발레단이 선보인 이 작품은 얼어붙은 발레팬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십여년 전 국립발레단의 전성기 시절, 무대 위에서 스타들이 탄생하며 관객의 마음을 훔쳤던 그 당시의 활기와 설렘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변화의 첫 울림은 거장에 대한 예우에서 출발했다. 공연장 로비에서 펼쳐든 프로그램북 맨 앞에 적힌 글귀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를 향한 추모와 존경이 담겼다. 바르는 국립발레단 버전의 지젤을 만들어준 거장이다. 과거 국립발레단의 프리마돈나로, 지젤의 선(線)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주원 단장은 파트리스 바르에게 프로그램북을 빌어 편지를 띄웠다. 국립발레단장으로 돌아와 위대한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다짐, 발레단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국립발레단 '지젤' 1막에서 죽음을 맞는 지젤. ⓒ국립발레단 Photo by YOON6PHOTO
국립발레단 '지젤' 1막에서 죽음을 맞는 지젤. ⓒ국립발레단 Photo by YOON6PHOTO
존경의 토대 위에 마련된 작품을 색다르게 호흡하게 만든 동력은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나왔다. 지휘자가 바뀌었다. 발레 전문 지휘자 필립 엘리스가 이끈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무대 위 동작과 음악을 차곡차곡 맞아 떨어지게 이끌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퍼져나온 정교한 앙상블은 2막 윌리들의 군무와 함께 극장 전체를 낭만적인 저세상의 공기로 채웠다.

단원들의 가능성도 피어났다. 김주원 단장은 국립발레단원들을 골고루 주역으로 기용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나눠줬다. 군무 속에 숨어있던 이들과 신예들이 기회를 잡았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영원한 지젤'로 불렸던 황혜민 전 수석무용수가 절친한 김주원 단장의 구원투수가 됐다. 그는 게스트 마스터로 참여해 무용수들의 디테일을 다듬어줬다. 늘 보던 고전작에 예측할 수 없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국립발레단 '지젤' 2막, 윌리들에게 둘러싸인 알브레히트와 지젤.  ⓒ국립발레단 Photo by YOON6PHOTO
국립발레단 '지젤' 2막, 윌리들에게 둘러싸인 알브레히트와 지젤. ⓒ국립발레단 Photo by YOON6PHOTO
윌리들의 군무, 투 윌리, 지젤의 엄마 역할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하연은 마침내 꿈꾸던 지젤이 됐다. 무덤을 찾아온 알브레히트를 스쳐 지나가며 발끝을 세워 빠르게 퇴장하는 모습에선, 고개를 한없이 뒤로 젖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표현했다. 또 다른 지젤 이은서는 소녀의 풋풋함, 배신당한 절망 등 섬세한 연기로 몰입감을 높였다. 역시 지젤로 데뷔한 엄나윤도 단단한 테크닉과 2막에서 몽환적이고 아련한 움직임으로 독자적인 지젤의 잔상을 남겼다.

공간의 변화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1막 지젤의 집 뒤편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한 연기는 15년 만에 부활했다. 시골 마을의 서정성과 그 뒤에 도사린 비극의 복선을 아늑하게 드리우는 장치였다. 소품 하나, 무용수들의 미세한 시선과 동선까지 공들여 다듬어진 연출은 1막의 충격적인 비극과 2막 영혼의 세계 사이를 한층 밀도 높게 이어주었다.

거장에 대한 예우, 음악과 무용의 밀착, 기회를 터준 리더십. 익숙함과 매너리즘에 묻힐 뻔했던 고전을 다시 피어나게 한 올해의 지젤은, 또 다른 이들이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할 내일을 기꺼이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