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간다. 역사는 그 모든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 개인의 삶이란 백사장의 작은 모래알과 같아서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 잠기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의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비극의 일부로 뭉뚱그려지고, 생의 그릇에 함께 담겼던 기쁨과 슬픔, 꿈과 사랑은 쉽게 잊힌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남을까. 얼마나 잘 살았는지, 무얼 이뤘는지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세상에 존재했음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21일 개봉하는 송일곤 감독의 신작이자 배우 김혜자의 스크린 복귀작 ‘여전히 찬란하게’는 이런 작지만 소중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라 눈길을 끈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끝까지 붙잡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과정이 뭉클하다.

영화의 얼개는 특별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를 겪은 여성의 상처를 다룬다. 익숙한 역사극 소재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영화는 비극의 순간보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행복한 시간에 더 오래 머물러 있다. 송 감독이 낭독극 형식의 짧은 대본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 시나리오로 발전시켰다는 점은 이런 접근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상북도 산골에서 나고 자란 열일곱살 정임(최주은)과 순옥(박서경)은 산과 들을 누비며 노래한다. 언젠가 서울에서 정임은 최고의 가수가 되고, 순옥은 그를 무대에 올리는 단장이 될 거란 꿈을 키운다. 2026년 여느 청춘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역사책이나 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덜하다. 어린 순옥을 연기한 박서경이 촬영 당시 나이가 17살이라는 점도 생동감에 한몫한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의 서사를 이루는 세 개의 시간 포인트 1942년, 1991년, 2010년을 눈여겨보자.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은 일제의 전시 동원과 수탈이 극심해지던 시기다. 그리고 1991년은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선 해다. 오래 침묵 속에 묻혔던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기억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인데, 영화는 이 시기를 위안부 피해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60대 노년을 맞이한 순옥과 정임이 서울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려 준비하는 모습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영화 속 1991년의 두 사람은 2010년 치매를 앓는 여든다섯의 노인 순옥이 그리는 허구의 시간이다. 일본군에 끌려간 정임은 여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해가 더 지나 붙잡고 있는 기억마저 희미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 정임을 기억하려는 책임감이 순옥의 시간을 1991년에 멈춘 것이다.

실제로도 1991년과 2010년이 약 20년의 시차가 있다는 것, 김혜자와 20여년의 나이 차가 있는 차미경 배우가 정임을 연기하는 데서 관객은 이 허구의 시간을 갈망하는 순옥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정서는 한층 깊어진다. 1942년과 1991년 순옥과 정임이 나누던 웃음은 끝내 이루지 못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개봉에 앞서 지난 8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을 당시 적잖은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며 코를 훌쩍거렸을 정도로 먹먹한 감정이 생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뮤지컬 요소도 독특하다. 경쾌한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며 영화는 한 편의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 영화에선 흔한 연출이 아닌 데다, 종종 서사의 흐름을 끊는다고 느껴질 수 있어 호불호는 갈릴 만하다. 유독 클로즈업이 많은 장면 연출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송 감독은 이를 두고 “다큐멘터리처럼 접근할 수도, 사회·정치적 관계를 중심으로 다룰 수도 있겠지만, 저는 관객들이 과거의 사람들을 조금 다르게 경험하길 바랐다”며 “이 영화를 하나의 인물화로 상정하고 연민과 슬픔, 측은함과 기쁨 같은 미묘한 감정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김혜자의 존재감은 압권이다. 거창한 대사나 격렬한 감정 표현 없이도 오랜 세월 쌓인 그리움이 느껴진다. 65년 차 대배우가 젊은 순옥과 정임을 연기한 10~20대의 신인 배우 박서경, 최주은과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꽤 인상적이다.

송 감독에 따르면 당초 김혜자는 영화 출연을 고사했다. ‘집 앞의 들꽃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영화가 품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려면 김혜자의 얼굴이 꼭 필요하다고 믿은 송 감독은 수 차례 찾아가 설득했고 “내가 출연하는 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하겠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스크린에 돌아온 김혜자의 연기는 영화 제목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영화계에선 국내 주요 건설사인 대우건설이 자회사 스튜디오 프루지오를 세워 처음 투자한 작품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상업성보다는 독립·예술영화에 투자를 지향하는 만큼 ‘여전히 찬란하게’의 성과가 투자 경색으로 신음하는 국내 독립 영화판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다. 118분.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