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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안가면 앞으로 못 먹을지도"…전세계 미식가 스페인 향하는 이유 [이영민의 테이블 위의 세계]
불은 오직 한 사람만 만진다…
전설의 고집이 쌓아올린 신화
바스크의 '아사도르 에체바리'
두 제자를 거쳐 마주한 스승의 불
그리고 별 하나의 이유
전설의 고집이 쌓아올린 신화
바스크의 '아사도르 에체바리'
두 제자를 거쳐 마주한 스승의 불
그리고 별 하나의 이유
미식 여행에는 늘 '주인공'이 되는 레스토랑이 있다. 많은 미식가들이 때로는 그 한 곳을 위해 긴 여정을 시작하기도 한다. 3주 가까이 떠났던 유럽 미식 여행의 주인공을 하나 꼽자면 단연 스페인 바스크의 '아사도르 에체바리'(Asador Etxebarri)다.
'아사도르'는 장작불에 재료를 굽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로컬한 장르다. 에체바리는 이 장르를 현대 미식의 무대로 끌어올려 전 세계에 퍼뜨린 인물이다. 스페인을 미식 강국으로 만든 엘불리 다음으로 세계 미식계에 큰 영향을 끼친 곳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이 살아 있는 신화의 창시자가 머지않아 은퇴를 할 수 있어 사진과 글로만 전해지는 전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덩굴 옆 에체바리 입구의 나무 간판 / 사진. ©이영민
방문 당일인, 빌바오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바로 전날 들른 제자의 레스토랑 치스파(Txispa)에서는 눈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산맥에 압도됐다. 하루 만에 뒤바뀐 날씨가 마치 두 레스토랑이 마주할 미래처럼 느껴졌다.
구름이 내려앉은 아슈페 마을의 산과 초원 / 사진. ©이영민
빌바오에서 차로 30분, 인구 250명 남짓한 마을 아슈페(Axpe)에 닿는다. 이날 마을 광장은 18회째를 맞은 산악 트레일 레이스로 북적였다. 레스토랑에 들어서기 전 레이스 현장부터 카메라에 담았다. 렌즈를 향하자 사람들은 금세 알아채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현지 말로 고맙다는 뜻의 '에스케리크 아스코(Eskerrik asko)'를 속으로 외쳤다.
제18회 산악 트레일 레이스로 붐비는 아슈페 성당 앞 광장 / 사진. ©이영민
성당 종탑 아래 자리한 평범한 2층 벽돌 건물이 에체바리다. 이름은 바스크어로 '새 집'이라는 뜻이다. 덩굴로 뒤덮인 벽에 적힌 'etxebarri / JATETXEA(식당)'라는 글자 앞에서, 1년을 준비해 1만km를 날아온 순례자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1989년 그는 마을 광장의 200년 된 옛 바 건물을 사들였고, 이듬해 아사도르로 문을 열었다. 지금도 1층은 마을 사람들이 드나드는 바, 다이닝룸은 2층이다.
에체바리 다이닝룸 / 사진. ©이영민
이곳에서 재료를 불에 올리는 사람은 오직 비토르 한 명이다. 그는 "여기에는 내가 하는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 "내가 있을 수 없으면 에체바리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자리를 비우는 날이면 레스토랑도 쉰다. 스타셰프가 되면 주방보다는 TV에 나오기 바쁜 요즘 보기 힘든 고집스러울 만큼 철저한 장인정신이다.
그 철저함은 불에서도 드러난다. 에체바리는 시판 숯 대신 잉걸불을 쓴다. 따로 둔 화덕에서 통나무를 태워 불꽃이 잦아들고 속이 붉게 달아오르면, 그 잿불을 그릴로 옮긴다. 숯은 향이 공격적이어서 재료 본연의 맛을 가린다는 것이 비토르의 설명이다.
나무도 재료마다 다르다. 생선과 해산물에는 연기가 부드러운 나무를, 고기에는 연기가 강한 나무를 쓴다. 오래된 참나무를 기본으로, 일부 붉은 고기에는 포도나무 가지를, 연어에는 감귤나무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모델에게 꼭 맞는 옷을 입히듯, 재료에 맞는 향을 입히는 셈이다. 그릴은 도르래로 높낮이를 조절하는 승강식이고, 달걀 노른자나 캐비어처럼 섬세한 재료를 위한 맞춤 도구도 따로 만들었다.
엘불리가 첨단 기법으로 스페인 미식을 질주시키던 시절, 비토르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소스와 가니시를 덜어내고 불과 소금, 기름만으로 풍미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2020년 영국 BBC는 그가 수백 년 된 바스크 아사도르의 전통을 놀라운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평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이름으로 에체바리는 2008년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에 44위로 처음 진입한 뒤, 2024년과 2025년 연속 2위에 올랐다. 2025년에는 '유럽 최고의 레스토랑'으로도 선정됐고 오는 11월에 발표되는 2026년에는 과연 왕자에 오를 수 있을지 전세계 미식가의 관심사이다.
지난해 3월 파이어도어, 전날 치스파에 이어 마지막으로 스승의 집을 찾았다. 1년에 걸쳐 두 제자와 한 스승의 궤적을 따라 걸은 셈이다. 세 곳을 잇는 공통분모인 훈연 캐비어가 정작 원조에서는 정규 코스가 아닌 추가 메뉴였다. 10g에 50유로에 달하는 캐비어였지만, 내가 주문할 것을 강하게 주장해 결국 20g 주문했다.
추가 메뉴로 주문한 훈연 캐비어 / 사진. ©이영민
다시마를 깔고 연기를 입히는 방식은 세 곳이 같지만, 이곳은 돼지 라드 하나만 곁들인다. 섬세한 훈연 향은 라드에 묻히지 않고 또렷했고, 지방의 무게감이 캐비어의 염도를 부드럽게 감쌌다. 병아리콩 두부 소스를 더한 치스파의 캐비어와는 차원이 달랐다. 역시 원조는 원조였다.
숟가락으로 떠 올린 훈연 캐비어 / 사진. ©이영민
이날의 백미는 팔라모스 새우였다. 카탈루냐 팔라모스 앞바다에서 잡혀 품질보증 마크를 다는 지중해 붉은 새우다. 머리 속 내장의 풍미는 아시아에서 먹던 새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했다. 살은 찰진 날것보다 한 끗 더 익힌 결이었다. 전날 치스파의 새우도 훌륭했지만, 질감과 훈연 향에서 스승과 제자의 그릴은 아직 격차가 분명했다.
장작불에 구운 팔라모스 붉은 새우 / 사진. ©이영민
직접 만드는 초리조도 잊기 어렵다. 이베리코 돼지고기에 텃밭에서 키운 고추를 넣는다. 한 점 맛보고 나니, 그동안 한국에서 먹어온 것은 초리조가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구 등살의 익힘도 놀라웠다. 푸딩처럼 바스러질 듯 부드러웠다.
장작불에 구운 팔라모스 붉은 새우 / 사진. ©이영민
레어에 가까운 익힘으로 구운 자고새는 잡내 없이 좋았지만, 쌉싸름한 잎 소스는 덜어 가며 먹어야 했다. 불 향과 익힘은 흠잡을 데 없지만, 다른 재료와의 조합이나 한 접시로서의 구성은 최정상급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초록 잎 소스를 곁들인 자고새 구이 / 사진. ©이영민
바스크식 소고기 스테이크인 촐레타는 9년 된 갈리시아 소를 한 달가량 숙성해 두툼하게 구워 낸다. 다만 180일 숙성한 치스파 촐레타의 블루치즈 같은 풍미도, 게타리아 엘카노(Elkano)의 감칠맛도 느끼지는 못해 전체 미식 여정에선 딱 중간 레벨 정도였다.
갈리시아 소 촐레타(바스크식 소고기 스테이크) / 사진. ©이영민
반전은 디저트였다. 이곳의 대표 메뉴로 꼽는 졸인 우유 아이스크림에는 비트루트가 곁들여 나온다. 아이스크림의 스모키한 향이 비트루트와 만나 햄과 치즈를 함께 먹는 듯한 풍미를 냈다. 거품처럼 폭신한 초콜릿 수플레도 지나치게 달지 않아 좋았다.
졸인 우유 아이스크림과 비트루트 / 사진. ©이영민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알제리 태생의 소믈리에 모하메드 베나브달라(Mohamed Benabdallah)는 2025년 월드 50 베스트의 '월드 베스트 소믈리에상'에 이어 올해 스페인 국가 미식상 최우수 소믈리에상까지 받았다. 차림은 캐주얼한 셔츠지만 추천은 빠르고 정확하다.
추천해준 와인을 시음하는 소믈리에 모하메드 베나브달라 / 사진. ©이영민
필필 소스를 곁들인 도미 구이 / 사진. ©이영민
그렇다고 가볼 가치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재료를 직관적으로 구워 극한까지 끌어올린 맛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1960년생인 비토르는 어느덧 예순 중반이다. 그는 "모든 순환은 시작하고 끝난다. 내가 끝나면 이것도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는 그가 언제까지 이 불 앞에 설지는 아무도 모른다. 늦기 전에 아슈페로 향하길 권한다. 스페인까지 날아갈 가치가 충분한 순례지다.
식사를 끝마친 후 복도 너머로 보이는 에체바리 다이닝룸 / 사진. ©이영민
'아사도르'는 장작불에 재료를 굽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로컬한 장르다. 에체바리는 이 장르를 현대 미식의 무대로 끌어올려 전 세계에 퍼뜨린 인물이다. 스페인을 미식 강국으로 만든 엘불리 다음으로 세계 미식계에 큰 영향을 끼친 곳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이 살아 있는 신화의 창시자가 머지않아 은퇴를 할 수 있어 사진과 글로만 전해지는 전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맨바닥에서 일군 불의 성지
이 성지를 일군 이는 비토르 아르긴소니스(Bittor Arginzoniz)다. 1960년 이 일대에서 태어난 그는 요리학교를 다니지도, 다른 레스토랑에서 수련하지도 않았다. 셀룰로오스 공장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불을 익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어린 시절의 집에서는 요리도 난방도 모두 불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는 요리 업계 출신이 아니다. 맨바닥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1989년 그는 마을 광장의 200년 된 옛 바 건물을 사들였고, 이듬해 아사도르로 문을 열었다. 지금도 1층은 마을 사람들이 드나드는 바, 다이닝룸은 2층이다.
그 철저함은 불에서도 드러난다. 에체바리는 시판 숯 대신 잉걸불을 쓴다. 따로 둔 화덕에서 통나무를 태워 불꽃이 잦아들고 속이 붉게 달아오르면, 그 잿불을 그릴로 옮긴다. 숯은 향이 공격적이어서 재료 본연의 맛을 가린다는 것이 비토르의 설명이다.
나무도 재료마다 다르다. 생선과 해산물에는 연기가 부드러운 나무를, 고기에는 연기가 강한 나무를 쓴다. 오래된 참나무를 기본으로, 일부 붉은 고기에는 포도나무 가지를, 연어에는 감귤나무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모델에게 꼭 맞는 옷을 입히듯, 재료에 맞는 향을 입히는 셈이다. 그릴은 도르래로 높낮이를 조절하는 승강식이고, 달걀 노른자나 캐비어처럼 섬세한 재료를 위한 맞춤 도구도 따로 만들었다.
엘불리가 첨단 기법으로 스페인 미식을 질주시키던 시절, 비토르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소스와 가니시를 덜어내고 불과 소금, 기름만으로 풍미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2020년 영국 BBC는 그가 수백 년 된 바스크 아사도르의 전통을 놀라운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평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이름으로 에체바리는 2008년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에 44위로 처음 진입한 뒤, 2024년과 2025년 연속 2위에 올랐다. 2025년에는 '유럽 최고의 레스토랑'으로도 선정됐고 오는 11월에 발표되는 2026년에는 과연 왕자에 오를 수 있을지 전세계 미식가의 관심사이다.
두 제자를 지나 스승의 캐비어에 닿다
에체바리에서 만들어진 '불의 신화'는 사람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곳에서 5년을 일한 레녹스 헤이스티(Lennox Hastie)는 시드니에 파이어도어(Firedoor)를 열었고, 10년을 일한 마에다 테츠로(Tetsuro Maeda)는 걸어서 닿는 거리에 치스파를 열고 단숨에 미슐랭 1스타를 얻었다.지난해 3월 파이어도어, 전날 치스파에 이어 마지막으로 스승의 집을 찾았다. 1년에 걸쳐 두 제자와 한 스승의 궤적을 따라 걸은 셈이다. 세 곳을 잇는 공통분모인 훈연 캐비어가 정작 원조에서는 정규 코스가 아닌 추가 메뉴였다. 10g에 50유로에 달하는 캐비어였지만, 내가 주문할 것을 강하게 주장해 결국 20g 주문했다.
완벽한 불, 아쉬운 접시
물론 모든 접시가 '신화'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하드웨어와 서비스는 평범한 시골 레스토랑에 가깝고, 음식 설명도 짧다. 5시간 30분에 이르는 식사는 템포가 들쑥날쑥해 30분 가까이 요리가 나오지 않는 구간도 있었다. 맛조개 요리는 비린 맛이 남았고, 위에 올린 소스의 존재감이 약했다. 복합미를 중시하는 미슐랭 가이드의 눈에는 이런 부분이 단점으로 비치지 않았을까.레어에 가까운 익힘으로 구운 자고새는 잡내 없이 좋았지만, 쌉싸름한 잎 소스는 덜어 가며 먹어야 했다. 불 향과 익힘은 흠잡을 데 없지만, 다른 재료와의 조합이나 한 접시로서의 구성은 최정상급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 2위와 별 하나 사이
에체바리는 2010년판 미슐랭 가이드에서 처음 별을 받은 뒤 지금까지 1스타다. 방문 전에는 이 순례지가 콧대 높은 미슐랭에 한 방 먹여주길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나니 상당 부분 수긍이 갔다. 불로 재료의 본질을 끌어올린 접시는 경이로웠다. 하지만 소스와 가니시, 한 접시 안의 복합적인 레이어라는 현대 다이닝의 수준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차라리 코스 내내 재료 하나에만 집중했다면 모르겠다. 복합미를 노린 접시일수록 만족도가 비교적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