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 기자
이솔 기자
출근하려고 문을 나서는데 초인종 아래에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 “선생님, 저 기억 못 하시겠어요?”. 알고 보니 15년 전 가르치던 과외 학생이다. 반가움보단 당혹감이 앞선다. 애써 묻어둔 옛날 기억까지 문 앞에 도착한 듯해서다. ‘착한 사람’인 나진은 차마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를 집 안에 들인다. 줄줄이 벌어지는 불행의 씨앗과도 같은 일이었다.

소설가 이서수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30대 후반 여성 나진을 그린 <우리 착한 나진>으로 돌아왔다. 남의 입길에 오르기 싫어서 책잡힐 일을 피하고, 까다로운 부탁에도 쉽게 고개를 젓지 못하는 모습은 나 혹은 주변의 누군가와 닮아 있다. 이서수는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면서 살아가기를 바랐는데 잊고 싶은 기억을 하루아침에 맞닥뜨리면 어떨까를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다혜가 찾아온 것은 나진이 오래전 건넨 말 때문이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과외 선생이던 나진은 외로운 다혜를 위로하려 자신도 어린 시절 친구가 없었다고 거짓말했고, 빚쟁이에게 주라며 다혜 엄마를 대신해 돈을 건네주기도 했다. 다혜는 과거의 말과 행동을 빌미로 도움받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나진은 과거의 ‘절반의 진심’을 이어갈 준비가 안 됐다.

작품은 나진의 심리를 묘사하면서 그의 ‘착함’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정말 남을 위해서 한 행동이나 말이었는지,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을 피하려던 것이었는지 묻는다. 나진의 마음 속을 괴롭히는 다혜와의 ‘묻어둔 기억’도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그렇다고 그 행동을 모두 위선으로 돌릴 수 있을까. 나진에게는 사실 착한 척하는 행동이었더라도, 어린 다혜에게는 고맙고 의지가 되는 일이었다. 이서수는 “만약 나진이 착하기만 했다고 생각했으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도 “선의를 꾸며서 보여주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말했다.

진심은 절반뿐이었지만 나진과 다혜는 함께 살아간다. 이번엔 관계가 역전됐다. 전세사기로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직장에서도 괴소문에 휘말려 나온 나진을 다혜가 보살핀다. 다혜는 장을 보고 밥을 지으며 나진의 끼니를 챙긴다.

새로 이사간 곳 집주인 할아버지와도 늘상 안부를 주고받으며 막걸리와 파전을 나눈다. 원망스러웠던 다혜의 엄마와도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 이서수가 그리는 연대는 이런 일상의 모습에 있다. 그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가까운 연대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우리 착한 나진’ 펴낸 소설가 이서수 “적당히 괜찮은 사람 이야기죠”
이야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서수 자신도 결정적인 장면을 쓰기 전까지, 그곳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몰랐다고 했다. 평소에는 결말까지 상당 부분 정해놓고 쓰지만 이번에는 미정 상태로 시작해서다.

이서수는 각 인물의 선택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쓰는 데 중요한 단서는 나이였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다혜와 나진은 각각 열다섯 살과 스물세 살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서른 살과 서른여덟 살.

여덟 살이라는 차이는 그대로지만, 관계가 반대로 역전될 가능성은 활짝 열렸다. 이서수는 “15년이라는 시간이 인물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작품 <젊은 근희의 행진>, <마은의 가게>에 이어 이번에도 제목을 주인공 이름으로 지었다. 이서수는 인물상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으면 소설을 시작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 사람에 대한 상상에서 이야기가 출발하는 만큼 제목에 그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다음 작품으로는 ‘이 시대에 드문 사랑’을 하는 3남매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최한종 기자/사진=이솔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