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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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첨단기업을 겨냥한 해외 특허소송이 잇따르는 가운데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형 증거개시제도(디스커버리)'가 반도체·통신 분야의 핵심 기술과 영업비밀 유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상대 기업의 자료 제출과 현장 조사를 강화하기에 앞서 소송 배후 자본 공개와 자료 유출 방지 등 안전장치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1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이 지식재산처 등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당한 특허소송은 558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대기업 대상 소송은 453건으로 전체의 81.2%를 차지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른바 '특허괴물'로 불리는 비제조 특허전문회사(NPE)의 공세가 두드러졌다. 2024년 미국에서 국내 기업이 피소된 97건 가운데 78건(80.4%)이 NPE가 제기한 소송이었다. 최근에는 미국 특허관리전문회사 모놀리식 3D(MonolithIC 3D)가 SK하이닉스 HBM 제품이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수입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의원실은 해외 특허소송의 자금 출처와 실질 권리자가 불투명한 사례도 제시했다. 의원실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낸 스테이턴 테키야에는 중국 선전 소재 퍼플바인 IP가 자금을 제공했다. 미국 법원은 해당 사건에서 기밀자료가 부정하게 취득·활용된 사실을 인정했다.

G+커뮤니케이션즈는 중국 ZTE에서 매입한 5G 표준특허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실질적인 소송자금 조달원은 공개하지 않았다고 의원실은 설명했다. SK하이닉스를 상대로 낸드플래시 관련 소송을 낸 AMT 역시 모회사의 실소유주가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원실의 지적이다.

법원의 보호명령에도 기밀자료가 외부로 넘어간 사례도 있었다. 홍콩 반도체기업 실리콘모션테크놀로지(SIMO) 관련 미국 특허소송에서는 비밀문서 4건이 중국 소송 담당 변호사들에게 전달됐고, 법원은 약 2년 뒤 4만달러의 제재를 부과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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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지식재산처는 특허침해소송 전반에 증거개시제도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관련 특허법 개정안에는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의 현장 사실조사와 자료보전명령, 법정 밖 진술녹취 등이 포함돼 있다.

제도가 도입되면 특허 침해를 주장하는 기업은 상대방이 보유한 자료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증거 확보 부담을 덜 수 있다. 반면 반도체 공정이나 통신 기술처럼 민감한 내부 자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보호장치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영업비밀 유출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게 최 의원실의 주장이다.

법무부와 법원행정처도 제도 보완 필요성을 제기했다. 법무부는 법정 외 진술녹취와 관련해 법관이 없는 장소에서 증명력 판단이 이뤄질 경우 헌법상 재판청구권을 중대하게 제한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법원행정처는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패소 판결이나 소송비용 부담 등 제재수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료 제출 강제력이 커질수록 기업의 영업비밀을 보호할 장치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기업이 추가로 부담할 비용에 대한 최신 분석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지식재산처는 한국형 증거개시제도 도입 시 전문가 1명의 사실조사를 기준으로 건당 약 600만원, 시장 전체로는 약 6억원의 비용이 추가될 것으로 본 2019년 추산치를 제시했다.

다만 의원실은 제도 확대에 따른 기업의 전자증거개시(e-Discovery) 관련 IT 인프라와 영업비밀 관리 비용에 대한 최신 실증 추계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지식재산처는 영업비밀 관리비용의 실증 추계는 추후 연구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현재 수탁·위탁 거래에 한정해 전문가 사실조사와 자료보전명령을 도입하는 상생협력법은 2028년 2월 시행될 예정이다.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비밀유지권(ACP)을 법제화한 개정 변호사법은 내년 2월 시행된다.

최 의원은 "증거 편재로 억울함을 겪는 특허권자를 돕고 중소기업을 구제하겠다는 취지에는 적극 공감한다"면서도 "한국 반도체의 심장인 HBM 기술까지 해외 특허괴물의 타겟이 된 엄중한 상황에서, 실체 불분명한 외국 자본이 우리 안방의 자료에 무방비로 접근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지식재산처는 국내 기업 비용 부담 추계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소송자금 및 실질 권리자 공시 의무화, 목적 외 사용 금지와 실효성 있는 제재 방안 등 3중 잠금장치를 시행 전에 확실히 정비해야 한다"며 "2028년 시행되는 상생협력법의 현장 성과를 우선 검증한 뒤 특허법 전면 확대를 신중히 논의하는 것이 순리"라고 강조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