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 넘어 면허취소·취업제한 등 불이익 뒤따라
집행유예 받아도 생계·직업 잃을 수 있어
선고형 넘어 '형의 총량' 고려할 필요성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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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기원전 18세기경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의 유명한 구절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하면 자기 눈도 잃고, 이를 부러뜨리면 자신의 이도 부러뜨린다는 이른바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다. 이 문구만 놓고 보면 상당히 잔혹한 형벌처럼 보여, 종종 복수나 가혹한 응징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응징 아닌 '보복의 한계'
그러나 사실 탈리오의 법칙에는 이런 일반적인 이해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국가에 의한 형벌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피해를 보면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가혹하게 보복했고,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왔다. 이 하나를 부러뜨린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방 목숨을 빼앗고, 다시 그 보복으로 상대방 가족까지 공격하는 식으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진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 피해만큼만 갚아주고 그 정도를 넘는 과도한 보복은 금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눈에는 눈'은 반드시 눈을 빼라는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는 눈까지만'이라는 한계를 정한 선언이었다. 응징의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을 정한 셈이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이러한 생각은 현대법의 '비례의 원칙'으로 이어진다. 현대 형벌 제도는 사적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국가에 의한 응보를 기본 이념으로 한다. 그런데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위한 국가의 제재라 하더라도 그 책임은 저지른 행위에 상응해야 하고, 필요 이상으로 가혹해서는 안 된다. 형사재판이 범죄의 종류와 피해 정도, 범행 동기 등 수많은 사정을 고려해 형을 정하는 것도 결국 범죄와 형벌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이 받게 되는 불이익은 법원이 선고하는 징역이나 벌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선고받은 형벌을 기준으로 다른 법률에 따른 여러 불이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문자격이나 취업에 관한 제한이다. 현행법상 일정한 형을 선고받으면 의료인의 면허가 취소될 수 있고, 특정경제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일정 기간 관련 기업체 등에 취업할 수 없다. 공무원이나 교원 역시 퇴직급여 등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법률이 형사판결을 기준으로 자격이나 직업, 각종 인허가 등에 제한을 두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제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의사와 같은 전문직이나 기업의 임원처럼 높은 신뢰와 책임이 요구되는 지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자격과 도덕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기준은 너무 추상적이기에, 결국 입법자는 일정한 형사처벌을 받았는지와 같은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 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일정 기준 이상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해당 직업이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입법자가 판단한 결과다. 따라서 면허취소나 취업제한이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형을 낮추는 것은 오히려 입법자의 의도를 잠탈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형벌 아닌 '형의 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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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현실에서 이러한 제한으로 인해 한 사람이 실제 겪게 되는 불이익이 때로는 형벌 자체보다 훨씬 가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고 생각해 보자. 실형을 면했다는 점에서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판결 때문에 수십 년간 유지해 온 전문자격을 잃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며, 앞으로 상당 기간 같은 일을 할 수도 없게 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인생과 정체성이 부정되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터전까지 송두리째 날아가는 결과가 된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경제적인 타격은 그 가족에게까지 이어진다. 그 사람에게 가장 무겁고 가혹한 제재는 형벌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판결 뒤에 따라오는 삶의 변화가 될 수 있다.
형벌은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고, 그에 따른 제재는 일정한 직업이나 지위에 필요한 자격을 정하는 것이니, 둘의 법률적 성격이 구분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피고인에게 그 구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두 하나의 형사판결에서 비롯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현실적인 불이익이기 때문이다.
비례의 원칙을 형식적으로 법원의 선고형에만 적용해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고형에 더하여 그 판결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이익까지 합쳤을 때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의 크기가 과연 그 행위에 상응하는지도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형의 총량'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법정에서 선고되는 징역과 벌금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뒤따르는 면허취소, 취업제한, 자격상실 등 그 사람이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 전체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물론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형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형벌에 더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중대한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형평에 맞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특혜가 아니라 비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는 이 말을 야만적인 고대 형벌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3700여 년 전 이 원칙은 얼마나 가혹하게 벌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벌할 것인가에 관한 해답이었다.
죄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책임의 크기를 판단하려면 법정에서 선고되는 형벌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판결로 인해 한 사람이 실제로 감당하게 될 불이익 전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각각의 제재가 따로 떼어놓으면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쌓였을 때도 여전히 그가 저지른 행위에 비례하는지는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눈에는 눈'의 진정한 의미는 눈을 빼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넘어가지 말라는 데 있다. 법이 문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책임을 묻는 국가에도 넘지 말아야 할 일정한 선을 그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수료한 후 공중보건의사로 근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판사로 임관하여 대법원 재판연구관(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고법판사 등 법원 주요 요직을 거쳤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LL.M)에서 미국회사법을 공부하였고, 의료인 출신이면서 부장판사 경력을 가진 국내 유일의 변호사로서, 의료인과 법관 출신으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법무법인 세종에서 주요 민형사 송무, 기업분쟁, 금융분쟁, 가상자산, 제약바이오 사건 등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