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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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영국인 기자 대니얼 튜더는 한국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은 기적을 이뤘다. 잘살아보고 싶다는 희망, 성장의 과실을 나눠야 한다는 당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어느 순간 대한민국을 한 지점으로 이끌었다. 선진국. 이제는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뜻밖에 찾아온 반도체 수출 호황 덕분이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인 나라 중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를 넘어선 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5개국뿐이다.

과정은 거칠었다. 정통 경제학이 배척하는 수단을 거침없이 동원했다. 불균형 발전, 국가 주도 성장, 관치, 가격 통제다. 그러나 국민 기업 정부의 일치된 이해관계, 공무원 기업인 등의 소명의식 등으로 돌연변이 정책을 진화의 재료로 삼아 한국은 선진국이 됐다.

60여 년 성장을 향한 질주는 그만큼 큰 그늘도 만들었다. 노인빈곤율,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선진국 꼴찌 수준인 출생률로 인해 생산가능인구는 줄고 있다. 세대 간, 젠더 간, 진영 간 갈등의 골도 깊다.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교육열은 계층 간 격차를 고착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지표는 2026년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국 사회는 소득 4만달러 시대에 맞는 품격을 갖추고 있는가.” 경제적 부유함에 걸맞은 제도와 문화, 즉 품격을 갖췄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국민은 아니라고 답한다.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62주년을 맞아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44.3%가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에 걸맞은 사회가 됐나’라는 질문에 ‘아니다’고 답했다. ‘그렇다’는 응답은 15.5%에 그쳤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는 “제도는 게임의 법칙으로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을 바꾼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 것인가. 국민은 설문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정책 및 제도의 신뢰 회복’(42.2%)을 가장 많이 꼽았다. ‘공정한 보상체계 확립’(20.1%), ‘다양성과 포용성 확대’(15.2%), ‘도전과 혁신 문화 확산’(12.5%), ‘실패 후 재도전 기회 확대’(9.3%)가 뒤를 이었다.

한국경제신문은 창간 62주년을 맞아 ‘소득 4만달러 시대의 품격…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리즈를 싣는다. 국민이 던진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개인의 욕망이 공공이익에 기여하는 사회인가,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나, 한국인은 왜 제도를 믿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나, 우리는 타인과 공존할 준비가 돼 있는가.

4만弗시대 코앞이지만…국민 절반 "준비 안됐다"
'패자부활 가능한 사회' 12%뿐…해결책 1순위는 '정책 신뢰 회복'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에 걸맞은 사회가 됐다고 보는 국민은 15%에 그쳤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국민은 ‘정책과 제도의 신뢰 회복’을 꼽았다. 경제적 성장에 비해 우리 사회의 성숙도는 여전히 뒤처져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62주년을 맞아 여론조사업체 피앰아이에 의뢰해 지난달 28일부터 5일간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조사에서 ‘한국은 4만달러 시대에 걸맞은 사회가 됐다고 보나’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은 15.5%에 그쳤다.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44.3%로 세 배에 육박했다. 부정 응답은 직업별로 자영업자(53.8%)가 많았고, 연령별로는 40대(48.6%)와 60세 이상(48.5%)에서 높게 나타났다.
소득 4만달러 시대, 우리는 그에 걸맞은 품격 갖췄나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에 한국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정책 및 제도의 신뢰 회복’이라는 응답이 42.2%로 가장 많았다. 2위는 ‘공정한 보상체계 확립’(20.1%)이었다. 이어 ‘다양성과 포용성 확대’(15.2%), ‘도전과 혁신 문화 확산’(12.5%), ‘실패 후 재도전 기회 확대’(9.3%) 순이었다.

정책과 제도의 신뢰 회복을 꼽은 비율은 나이가 많을수록 높았다. 60세 이상은 51.2%로 과반이었고, 50대 44.3%, 40대 39.5%, 30대 35.0%, 18~29세 32.5% 순이었다. 직업별로는 은퇴자(55.1%), 전업주부(50.8%), 자영업자(49.2%)에서 높게 나타났다. 젊은 층은 상대적으로 ‘도전과 혁신 문화 확산’에 무게를 뒀다. 18~29세는 22.3%가 이를 꼽아 60세 이상(6.6%)의 세 배를 넘었다.

보상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도 약했다. ‘한국 사회는 개인이 기여한 노력과 성과에 비례해 보상받는 사회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16.4%에 그쳤고 ‘그렇지 않다’는 39.9%였다. 40대에선 부정 응답이 44.6%로 가장 많았다.

‘그렇지 않다’고 답한 응답자에게 이유를 묻자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간 보상 격차가 크다’(27.6%)와 ‘성과보다 학력·학벌·출신·인맥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24.3%)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이어 ‘개인의 노력이나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어렵다’(17.5%), ‘경영진·대주주 등 일부에게 보상이 과도하게 집중된다’(15.5%) 순으로 답했다.

‘한국 사회는 패자 부활이 가능한 사회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은 12.1%에 그쳤다.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48.4%로 네 배였다. 이번 조사에서 긍정 응답률이 가장 낮은 문항이었다. 패자 부활을 위해 가장 필요한 지원으로는 ‘재취업·직업훈련 교육’(31.3%)이 1위로 꼽혔다. 이어 ‘실패 경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 개선’(21.5%), ‘빚 탕감 및 재창업 자금 지원’(20.9%), ‘법률·세무 상담’(14.2%), ‘심리 상담 등 정신적 회복 지원’(11.6%) 순이었다.

미래 설계도 막막하다고 봤다. ‘현재의 소득과 자산으로 내 집 마련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50.1%가 ‘계획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계획할 수 있다’는 22.5%에 그쳤다. ‘은퇴 후 노후생활’에 대해서도 50.6%가 ‘계획하기 어렵다’고 답해 ‘계획할 수 있다’(20.8%)의 두 배를 웃돌았다.

향후 10년간 경제생활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요인은 노후 소득(29.9%)이었다. 이어 물가·생활비(26.6%), 집값(17.6%), 일자리(17.4%), 세금(8.2%) 순으로 답했다. 18~29세는 일자리(35.7%)를, 30대는 집값(30.6%)을 가장 많이 꼽았다. 50대(36.5%)와 60세 이상(37.0%)은 노후 소득을 가장 크게 걱정했다.

정종화 삼육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 경제가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바라볼 만큼 성장했지만 일부 업종에 보상이 집중되고 집값 상승 속도가 기대소득 증가를 앞지르며 국민의 불안이 커졌다”며 “선진사회의 척도는 소득 크기보다 국민이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얼마나 믿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맹진규 기자 mae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