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희망 고문'으로 끝난 조각투자 샌드박스
금융규제 샌드박스는 일종의 ‘예비학교’다. 규제에 가로막힌 혁신 서비스를 시험 삼아 운영하게 한 뒤 검증을 통과하면 정식 인가를 내주며 ‘졸업’시키는 구조다. 제도 취지대로라면 졸업생에겐 최대 2년간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배타적 운영권도 보장된다. 그러나 조각투자 분야에서 이 학교는 ‘희망 고문’만 하다가 단 한 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문턱 앞에서 좌절된 현실은 8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허세영 루센트블록 대표가 참고인으로 출석하면서다. 루센트블록은 2021년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돼 4년 넘게 부동산 조각투자 유통 플랫폼을 개척했지만, 지난 2월 열린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에서 한국거래소와 넥스트레이드 컨소시엄 등 거대 자본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비단 루센트블록만의 비극이 아니다. 조각투자 샌드박스 ‘1세대’ 여섯 곳 중 정식 인가의 문을 넘은 곳은 전무하다. 카사는 8월 서비스를 접었고, 펀블은 7월 파산 절차를 밟았다.

처음부터 이런 결말이 예견된 것은 아니다. 당초 금융위원회의 입장은 샌드박스 사업자의 자연스러운 정식 사업자 전환에 가까웠다. 2024년 12월 설명회에서는 ‘법령이 개정되는 즉시 인가를 신청하라’고 독려했고, 이듬해 5월 입법예고에서도 이번 인가를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운영된 시범서비스의 제도화”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그해 9월, 돌연 단 두 곳만을 선정하는 치열한 경쟁 인가 체제로 전환됐다. 같은 시행령으로 제도화된 비상장주식 장외거래소의 경우 기존 샌드박스 사업자를 우선 심사해 배타적 운영권을 인정한 반면 조각투자에는 ‘배타적 운영권 인정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차별적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금융당국의 고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자본력과 정교한 내부통제 시스템을 갖춘 대형 사업자를 선정하는 것은 당국의 책무다. 그러나 당국 역시 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자인하고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날 국감에서 “스타트업은 미래의 희망이고 그 열정이 발휘되는 운동장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인가를 더 줄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사사건건 정쟁을 벌이던 여야조차 이번 사안에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당 관계자는 “정량적 자본 기준으로만 줄을 세운다면 스타트업이 제도화의 벽을 뚫을 기회는 사라진다”고 꼬집었다. 점수가 모자랐다는 말은 면피용 핑계에 불과하다. 길이 없던 황무지에 맨땅을 파며 길을 낸 혁신 기업에 “자본이 부족하다”는 한마디로 문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당국의 역할이 끝날 수는 없다. 결자해지의 책임은 당국에 있다. 졸업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학교에 제 발로 찾아올 학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