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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가 GPU에 돈을 거는 법 [박신영의 월가 아나토미]
인공지능(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담보로 한 대출과 자금조달 규모가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엔비디아는 GPU를 항공기처럼 장기 금융이 가능한 인프라 자산으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내놓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GPU는 통상 2~3년마다 새 세대가 나옵니다. 신제품이 출시되면 기존 칩은 고장 나지 않았더라도 성능과 전력 효율에서 밀립니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늙는 자산인 셈입니다.
반면 GPU를 활용한 일부 대출의 만기는 짧게는 6~7년, 길게는 10년까지도 이어집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GPU가 더 장기적인 금융자산이 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월가는 왜 빠르게 구형이 될 수 있는 칩에 장기 자금을 넣는 것일까요. 핵심은 금융회사가 GPU 자체만 담보로 보는 것이 아니라, GPU에서 발생하는 고객계약과 현금흐름까지 함께 본다는 데 있습니다.
새 GPU 나오면 장비 교체 수요 늘어
엔비디아 GPU는 대체로 2~3년 주기로 세대가 바뀝니다. H100에서 블랙웰, 루빈으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새 세대가 나올 때마다 연산 성능은 높아지고 전력 효율은 개선됩니다. AI 모델을 운영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같은 전력을 쓰면서도 더 많은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최신 칩이 유리합니다.
이 때문에 GPU는 물리적으로 고장 나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빨리 늙습니다. 3년 전 칩이 정상 작동하더라도 최신 칩보다 처리 속도가 느리고 전력 비용이 많이 든다면 데이터센터 운영자는 장비 교체를 검토하게 됩니다. GPU의 경제적 수명이 물리적 수명보다 짧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칩보다 긴 대출 만기, 고객사 보고 판단
AI 클라우드 기업 코어 위브가 GPU를 기반으로 조달한 대출 가운데에는 만기가 2031년 9월, 2032년 3월까지인 사례가 있습니다. 칩의 경제적 수명보다 두 배 이상 긴 기간입니다.
일반적인 담보대출은 담보 자산의 가치가 대출 기간 유지된다는 전제를 둡니다. 주택담보대출 만기가 긴 이유도 주택이 장기간 가치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GPU는 기술 변화가 빠릅니다. 3년 뒤 중고 가격이 얼마가 될지 평가할 공인된 기준도 아직 뚜렷하지 않습니다. 금융회사들이 단순히 “GPU가 있으니 돈을 빌려준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SPV가 바꾼 담보의 의미
GPU 금융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사례는 2023년 코어 위브의 약 23억달러 조달입니다. 당시 AI 기업들은 엔비디아 GPU를 대량 확보해야 했지만, 수천개에서 수만 개의 칩을 사는 데 수십억달러가 필요했습니다.
금융회사들은 GPU만이 아니라 고객계약을 함께 담보화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핵심 장치는 SPV, 즉 특수목적법인입니다.
SPV는 특정 자산과 계약을 별도로 담는 법인입니다. 코어 위브는 GPU와 고객계약을 SPV에 넣고, 이 법인이 고객에게서 받는 컴퓨팅 사용료로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도록 설계했습니다. 모회사가 어려워져도 SPV 안의 자산과 현금흐름을 비교적 분리하는 ‘도산격리’ 구조입니다.
일부 거래는 비소구(non-recourse) 방식입니다. 대출이 부실해져도 대주는 원칙적으로 모회사 전체 자산이 아니라 SPV 안의 GPU와 고객계약 현금흐름에 의존합니다.
담보의 정의가 달라진 것입니다. 담보는 GPU 한 장이 아니라, GPU와 이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고객계약의 묶음입니다.
월가는 계약의 현금흐름에도 집중
예를 들어 코어 위브가 메타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형 고객과 장기 사용계약을 맺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고객은 일정 기간 컴퓨팅 용량을 쓰고 사용료를 냅니다. 이 사용료가 대출의 이자와 원금을 갚는 재원이 됩니다.
대출기관에도 GPU의 중고가격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고객이 얼마의 사용료를 낼 수 있느냐입니다.
현재의 GPU 담보대출은 순수한 장비담보대출이라기보다 GPU·고객계약·SPV를 묶은 프로젝트금융에 가깝습니다. 고객의 신용도가 높고 계약기간이 길수록 대출기관은 현금흐름을 안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고객의 재무상태가 약하거나 계약이 불확실하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됩니다. 월가는 칩 자체보다 칩에 붙은 계약의 질을 사고 있는 셈입니다.
구형 GPU도 활용도 높아
2~3년이 지난 GPU가 즉시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최첨단 거대언어모델을 처음부터 학습시키는 데는 최신 GPU가 유리하지만, 이전 세대 칩도 활용처가 남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AI 모델의 학습과 미세조정, 기업용 AI 서비스의 추론, 연구기관과 스타트업의 저비용 컴퓨팅 수요 등이 대표적입니다. 모든 AI 업무에 가장 비싼 최신 GPU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출기관이 잔존가치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구형 GPU의 재판매·재임대 수요가 침체 국면에서도 충분히 유지될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AI 투자 열기가 식거나 신형 칩의 성능과 전력 효율 격차가 더 벌어질 경우 구형 GPU의 가치는 예상보다 빠르게 하락할 수 있습니다.
코어위브 이후 수십억달러 시장으로
GPU 금융시장의 정확한 전체 규모를 보여주는 공식 통계는 아직 없습니다. 상당수 거래가 비공개 사모신용시장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개된 거래만 봐도 규모는 수십억달러 단위로 커지고 있습니다.
코어 위브는 올해 3월 메타와의 장기 계약을 기반으로 약 85억달러를 추가 조달했습니다. 무디스는 A3, DBRS는 A 등급을 부여했습니다. GPU 기반 자금조달이 투자등급 시장으로 들어온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코어 위브는 8월에도 약 26억달러를 추가 조달했습니다. JP모간, MUFG,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등 대형 금융회사들이 참여했습니다.
AI 클라우드 기업 람다도 8월 약 9억2600만달러 규모의 GPU 자산담보 SPV 대출을 조달했습니다. 투자등급 고객의 확정된 GPU 배치 물량과 계약 현금흐름을 기반으로 한 거래입니다. 네비우스도 7월 약 7억7500만달러 규모의 담보대출을 조달했습니다.
엔비디아는 8월 아폴로, 블랙록, 블랙스톤, 브룩필드, 골드만삭스, KKR 등과 함께 5000억달러 이상 규모의 AI 인프라 금융 플랫폼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제3자 자본을 끌어들여 GPU 금융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첫 번째 위험은 잔존가치
가장 큰 위험은 GPU의 잔존가치입니다. 대출 모델은 통상 일정 기간 뒤에도 GPU가 일정 가격에 팔리거나 재임대될 수 있다는 가정을 둡니다.
중고 H100은 약 1만8000~2만2000달러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품 가격인 약 3만5000~4만달러의 절반 안팎입니다. 하지만 이 가격이 AI 투자 침체 뒤에도 유지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형 B200 등의 공급이 크게 늘면 구형 GPU의 감가상각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부족이 지속되면 구형 칩의 가격이 예상보다 잘 버틸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국 현재의 중고가격은 AI 칩이 부족한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일 수 있습니다. 공급이 늘고 AI 투자 열기가 식으면 구형 GPU 가격은 빠르게 하락할 수 있습니다.
GPU, 아직 항공기만큼 평가는 못받아
황 CEO는 AI 데이터센터를 ‘AI 공장’으로 부르며 GPU가 항공기처럼 장기 금융이 가능한 자산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기존 운영자가 어려워져도 다른 기업이 GPU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GPU는 아직 항공기처럼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항공기 금융에는 오랜 역사와 표준화된 시장이 있습니다. 기종, 운항시간, 정비 상태를 기준으로 전문 감정사가 가치를 평가하고, 항공사가 파산해도 다른 항공사에 임대하거나 매각할 시장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데이터센터 건물과 전력설비도 비교적 표준화된 감정 방식이 있습니다. 반면 GPU는 3년 뒤, 5년 뒤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산정할 공인된 기준이 아직 부족합니다. 월가가 가장 경계하는 지점도 이 평가의 공백입니다.
엔비디아의 최대 25% 지원
엔비디아는 AI 인프라 금융 플랫폼에서 개별 거래에 따라 최대 25% 수준의 잔존가치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다만 이는 모든 거래에 자동으로 적용되는 일괄 보증은 아닙니다. 어떤 거래에 적용되는지, 지원이 발동되는 조건은 무엇인지, 손실을 누가 얼마나 나눠 부담하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치가 적용되면 대출기관은 GPU 가격 하락 위험 일부를 덜 수 있습니다. 더 긴 만기나 낮은 금리를 제시할 여지도 생깁니다.
그러나 역설도 있습니다. 칩을 파는 엔비디아가 칩 가치 하락 위험의 일부까지 떠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I 수요가 강한 동안에는 금융시장을 키우는 촉매가 될 수 있지만, 수요가 둔화하면 판매 둔화와 잠재적 지원 부담이 함께 커질 수 있습니다.
엔비디아, GPU 금융으로 생태계 강화
엔비디아가 GPU 금융을 확대하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 고객의 구매력이 커집니다. 현금이 부족한 AI 클라우드 기업, 스타트업, 정부, 일반 기업도 장비를 먼저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객은 수십억달러를 한 번에 내지 않고 GPU를 도입하고, 엔비디아는 더 많은 고객에게 칩을 판매할 수 있습니다.
둘째, GPU의 중고가치와 임대시장이 커집니다. 금융회사가 GPU를 담보로 인정하면 GPU는 단순한 전자장비가 아니라 재판매·재임대가 가능한 인프라 자산이 됩니다. 이는 신품 가격을 지지하고 구형 칩의 활용 기간을 늘리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엔비디아 생태계가 더 강해집니다. 금융회사가 엔비디아 GPU의 가격과 계약 구조, 잔존가치를 기준으로 대출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고객은 다른 칩보다 엔비디아 칩을 살 때 더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습니다. CUDA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고객을 묶었다면, GPU 금융은 자금조달 측면에서 엔비디아 중심 생태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